복지국가의 원칙에 충실한 사회를 위하여 - 스웨덴의 공중보건정책을 중심으로...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윤태호 교수
화려하지 않지만 보편주의 원칙에 입각한 건강형평성 정책 수행
▲ 보편적 의료서비스 정책을 취하고 있는 스웨덴(사진=픽사베이)
필자는 얼마 전 생전 처음으로 스웨덴에 다녀왔다.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복지국가 모형을 갖추고 있다는 스웨덴에 대해서는 말과 글로만 접했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던 터라 내심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어 스웨덴 방문 길에 올랐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복지국가체계 그 자체보다는 스웨덴에서 건강불평등 해결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유럽 내에서도 가장 평등한 국가에 속하며 가장 평균수명이 높은 나라가 스웨덴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건강 불평등이 있어봤자 얼마나 될 것이며 그러므로 건강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가장 포괄적인 건강형평성 정책을 만든 국가다.
사실 스웨덴은 영국처럼 건강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별도의 특정한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국가공중보건정책 그 자체가 건강형평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만들어진다.
주로 영미식 신자유주의 복지국가들은 건강형평성을 높이기 위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지역을 겨냥하는 잔여주의적 접근법을 주로 취하는 반면 북유럽 복지국가 들은 모든 계층과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제도로서의 보편주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스웨덴의 건강형평성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스웨덴 공중보건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한 건강형평성연구소(CHESS Center for Health Equity Studies)의 룬드베리(Olle Lundberg) 교수는 스웨덴의 건강불평등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지 않은 이유를 스웨덴의 강력한 보편적 복지제도로 설명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는 영국처럼 취약계층이나 취약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흥미를 끌만한 이름의 프로그램(예컨대 취약지역사업인 Health Action Zones 빈곤아동프로그램인 Sure Start 등)이 없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우리는 영국이 아니다”라는 간단한 말로 응답하였다.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웨덴은 화려하지 않지만 보편주의 원칙에 입각한 건강형평성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영국이 아니다”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우문현답이요 드러내고 자기 자랑을 잘 하지 않는 스웨덴 식 표현이었다.
우리 한국 사회가 워낙 잔여주의 복지체계에 익숙해져 있어서 특정 계층을 겨냥한 무언가 학문적 호기심과 시선을 끌만한 프로그램을 찾고자 했던 필자에게 스웨덴에서의 경험은 방법적인 것을 찾는 것에 앞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실상 불평등이라 함은 전 사회계층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이지 특정 사회계층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정책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에 대한 보편적 정책이 필요하다. 이는 보편주의 원칙에 입각한 건강형평성 정책이 가장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공중보건정책에서 보건의료서비스와 관련된 내용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공중보건이라 함은 흔히 공공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예방접종이나 전염병관리사업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중보건은 사회구성원(공중)의 건강에 관한 것이다. 즉 국가의 공중보건정책이라 함은 한 국가 내에 거주하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건강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이 모두 포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공중보건정책은 보건부처의 정책이 아니라 범정부적 정책이 되어야 한다.
실제 스웨덴의 공중보건정책은 노동 환경 보건복지 교육 문화체육 교통 경찰 등의 역할이 각각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범정부적이며 심지어 주택 소유자와 민간보험회사의 역할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스웨덴의 공중보건정책에서 또 하나 배워야 할 점은 철저한 ‘과정의 민주주의’이다. 대개 많은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국가보건정책을 만드는 과정은 전문가 집단과 연구소 및 보건부처의 공무원들이 모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고서는 관료의 손을 다시 거쳐 제도화 되는 것이 일반적 경로다.
그런데 스웨덴에서 국가공중보건정책을 만들 때에는 국회를 구성하는 모든 정당들로부터 파견된 전문가와 정치인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전문가들 중심으로 정책이 만들어지게 되면 정치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폐기 또는 무작정 지연되거나 원래 보고서의 내용이 왜곡되는 경향들이 많다는 사실을 경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건강불평등 문제의 해결이 스웨덴 사회가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라는 점을 정부와 모든 정당들에서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위원회의 보고서는 각 학회 연구소 지방의회 지방자치단체 노동조합 등에 배포되었고 각 기관과 단체에서 제출된 의견을 반영한 최종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하였다. 이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정치적 문서’였다.
이렇게 보고서가 만들어지기까지 3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지만 이렇게 투자된 시간과 노력은 스웨덴 국민들의 보다 질 높고 보다 평등한 건강을 위한 과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웨덴보다 건강불평등이 훨씬 큰 우리나라는 건강불평등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국민들의 실생활과 거리가 먼 정치적 사안을 주로 쟁점화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건강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상당한 정도의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면 스웨덴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책과정에서 민주주의 견지’와 ‘보편주의’에 근거한 정책 내용을 만드는 것이 건강불평등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순한 생각이 먼 나라 스웨덴을 생전 처음 다녀와서 느끼고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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