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바라본 가사노동
2021-05-21

▲ 사진출처=연합뉴스

지금 글 쓴다고 앉아 겨우 한 단락을 시작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리고 있다. 두 아이를 재운 밤, 컴퓨터를 켜놓고 글을 쓰다가 아, 맞다! 하면서 우리 집과 시댁에 갈 배달 반찬 주문을 마친 뒤 내일 장볼 목록에 우유를 추가해 카톡에 적어놓고 다시 글을 적는다. 두 아이들이 자고 있는 옆방에 내 정신 중 일부가 가있고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둘째가 앵 울면 가서 살피고 달래다가 잠이 깊이 들었을 무렵 살짝 빠져나왔더니 글 흐름이 끊겨 머리가 초기화되고 글쓰기 시동을 걸다 또! 앵! 소리가 난 것 같아 방문에 귀를 대보고 조용한 걸 확인한 후 살금살금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육아, 가사 등 집을 관리하는 ‘살림’의 늪에 처절하게 빠지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생산적 업무’를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뇌가 되는 것 같다. 내 눈에만 유독 띄는 집안의 일들, 머리 속 끊임없는 업데이트 중인 집안일 목록들이 다른 업무의 효율과 유능감을 방해한다.


어릴 때 매년 학교에서 가족의 인적사항을 적어내라고 했었다. 주부였던 엄마의 직업란에 ‘전업주부’라고 쓰자니 이상한 것 같고 그럼 ‘없음’이라고 써야 하는지 영 헷갈렸던 기억이 난다. 주부는 (표면적으로) 경제적 기여가 없고 하는 일이 매우 잡다해서 노는 것 같진 않은데 꼭 집어 무슨 일을 하는지 솔직히 몰랐으니까. 주부의 하는 일은 매우 잡다하고 끝이 없지만 티가 나지 않으며 그 노동을 가치 있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초등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주부 역할을 택한 엄마는 사회적으로 집에서 노는 여자였다. 그래서 탕수육처럼 특별한 걸 배달시킬 때 아빠한테 허락을 구하는 게 당연했고 자기 옷 하나 살 때도 아무래도 눈치를 보았으며 자신이 아닌 남편이나 아이들의 성공이 자기 인생목표인 양 몰입해야 했다. 당시 엄마 노동의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나는 그 노고를 알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돈벌이가 없는 것 때문에 별 인정도 못 받는 전업주부는 절대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더니 이제 ‘워킹맘’이 되었다. 집밖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나의 첫 번째 일터는 병원이고, 결혼 뒤 특히 아이가 태어난 후 집은 두 번째 일터가 되었다.

청소년기부터 간간히 설거지를 돕거나 속옷, 양말 손빨래를 하고 걸레로 방을 닦곤 했던 나는 집안일 수행이 간단하게 여겨지고 비교적 흥미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반복적인 잡일이 집안일의 핵심적인 부분이라 생각한 건 심각한 착각이었다. 의대 2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는데 그 당시 나의 자취방은 원룸 형태고 물건도 얼마 없어 손이 많이 갈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손이 안가면 금방 티가 났다. 빨래나 청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주방 관련된 일이라면 아예 손대기 싫었다. 솔직히 엄마가 해온 반찬을 차려먹기 귀찮고 썩은 걸 버리기도 끔찍해서 내 작은 냉장고에는 온갖 미생물과 매우 작은 곤충이 서식했고 더욱 충격적인 건 몇 개월인가 썩어버린 밥은 밥솥안에서 검은 액체가 돼서(신기하게도 냄새는 안났다! 정말이다!) 밥솥을 통째로 (엄마를 통해) 버리게 된 일도 있었다. 수개월 분명 썩은 밥이 늘 의식되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다보니 밥솥을 열지도 않고 그대로 둔 게 화근이었다. 한 인간이 삶을 사람답게 지내려면 많은 노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취 전에는 엄마가 해주었던 그 노동. ‘밥 먹어라, 새로 다림질한 옷으로 입어라, 방 정리해라’는 잔소리까지도 고스란히 집을 돌보는 일차책임자였던 엄마의 감정노동이었다.

혼자 살던 바로 그 자취방에서 남편과 신혼을 시작했는데 공간은 같았지만 둘이 된 후 내 마음가짐은 ‘이상하게’ 달라졌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자마자 우리 부부의 살림, 즉 안녕과 자활을 위해 집을 운영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안하면 결국 나의 일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쎄하게 들었다. 사회적 관습이 무섭다는 의미를 체감했다. 동시에 집이 돌아가게 하는 모든 일은 딱 떨어지지 않고 굵직한 일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노동이 훨씬 성가시다는 걸 알게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서 벌어지는 노동인데 누가 시키지 않는 한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었다니! 진짜 안 해보면 모른다는 그 흔한 말이 ‘별 볼 일 없는’ 집안일에 적용될 줄이야.. 그래도 나름 재밌게 할 만했던 살림의 로딩은 아이가 생기는 순간 폭발적으로 커진다. 그때부터는 수년간 ‘집 안의 일’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내가 첫째를 낳고 키우며 들었던 생각은 이 미친 육아(육아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가사까지)라는 고된 일을 어떻게 ‘우리 엄마를 포함해 특별하지도 않은 여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홀로 조용하게’ 해왔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잠깐, ‘집안일’이라는 용어를 자세히 짚고 넘어가자. ‘집안일’ 검색을 해보면 ‘집안일 리스트, 가사 분담표’ 형태로 정리된 내용이 나온다. 거기서 유추하듯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집안일’이라는 용어는 좁은 개념으로는 대체로 밥 짓기, 청소, 빨래 등 구체적으로 특정되는 물리적 행위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미혼 남녀가 자취하거나 룸메이트와 같이 살 때 발생하는 정리, 청소, 빨래 등 잡일은 집안일이라고 통칭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다. 주로 남과 여가 결혼해 이루는 ‘정상가정’에서 필요한 공동업무와 자기 관리 영역 및 배우자나 아이 돌봄의 영역이 뒤섞인, 보다 광범위한 개념의 노동역시 살림, 집안일, 가사(家事) 노동으로 지칭된다. 부부싸움의 주제가 집안일이라는 환자들을 무수히 보았다. 어떤 부부들은 같이 진료를 보러 와서 집안일 관련된 주제로 서로 무책임하다며 비난의 말을 주고받다가 격앙되어 아이와 내 앞에서 싸움을 한다. 잘 들어보면 한 쪽은 집안일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고 반대쪽은 집안일을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 ‘집안일’이라는 같은 단어를 서로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말하니 싸움이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집안일로 싸운다면 우선 서로가 생각하는 개념부터 확인하고 싸우셔야 한다.

집안일 책임을 공유하지 않는 남편에게 원망을 드러냈다가 부부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 어떻게 하면 남편과 집안일을 공유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는 기혼 여성들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많이 해주는 간지러운 조언이 있다. 남편을 마치 아들 대하듯! 잔소리하지 말고! 과정을 격려하고! 좋은 말로! 구체적인 언어로! 특정해서 업무를 부탁하되! 칭찬을 잊지 말고! 과도하게 고마워하지도 말라!는 요지의 조언을 그럴싸하게 풀어 말한다. 그 조언은 의미 있고 중요한 팁이지만 때때로 그걸 듣고 있는 환자의 표정을 통해 짐작되는 마음의 소리, “에휴, 그렇게 매번 시키는 게 얼마나 감정적으로 품이 드는 일인데.. 난 이미 지쳐서 그게 더 어려워, 혼자 하고 말지.”

그 마음의 소리, 나도 안다. 한때 남편은 나보고 “굳은 얼굴로 혼자 집안일을 하며 눈치보게 하지 말고 그냥 말로 시켜달라”고 했다. 답답해서 해결을 보고자 한 남편의 좋은 의도의 말에 오히려 난 폭발하고 말았다. “한가한 소리하네, 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지시를 해서 시킬 수 있는 ‘딱 떨어지는 집안일’을 찾아내어 분노와 불만을 절제한 뒤 좋은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부탁하는 그 감정노동이 버겁기만 했기에! 나도 ‘공식적으로는’ 가사노동이 여자의 의무라는 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였고 (심지어 전업주부 엄마의 가사노동을 헌신이라 치켜세우면서도 한편 집에서 논다고 깔보았으며) 집안일이 능숙하지 않아 힘든데, 파트너라는 사람이 수동적일 때 드는 생각과 감정은 더욱 스스로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잔소리라는 감정노동’을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아 그냥 내가 하는 거라고 응수했었다. 남편과 나의 집안일에 대한 경험 및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인하는 대화가 수년간 오갔다.

아, 대화가 아닌 말다툼이 더 적합한 표현이겠다. 현상적으로는 내가 늘 ‘먼저 문제를 들춰내고 불만스러워하며 싸움을 거는 쪽’이었다. 대신 내가 신경 쓴 것은 많이 지쳐있을 때가 아닌 좋은 표정을 억지로라도 지을 수 있을 때 말하자는 것이었다. 남편과 지긋지긋한 그 주제를 말하고 또 말했고, 말하다보니 내가 원하는 바를 뚜렷하게 알게 되어 좀 더 잘 정리해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포용적이고 사회적 센스 및 언어능력이 뛰어난 남편이기에! 점점 내 말을 이해했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해주어 변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서로 조율해갔다. 연애 때는 오빠이던 남편을 큰아들로 취급하고 싶지 않고,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 때문에 나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육아를 비롯해 모든 집안일은 남편과 책임과 과정을 공유한다. 여전히 철마다 옷과 이불을 바꾸고 관리하는 것은 내 몫이요, 가족들 먹거리와 건강식품을 챙겨주고 집에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제일 잘 알지만 남편 역시 가사와 육아를 꿰고 있으며 집안 보수와 기기 관리를 담당한다. 애들을 보육할 기관을 알아보고 신청하는 일, 아이들 옷가지를 사는 것도 먼저 챙기고 집안일 관련 가전제품도 남편이 알아보고 고른다(집안일을 직접 하니 그는 일을 자동화하는 가전제품에 관심이 크다). 난 이제 그가 없으면 통신비와 보험료를 싸게 낼 수도 없고, 애들을 제대로 된 기관에 보낼 수도 없으며 재미난 TV프로그램, 영화도 못 볼 것이다. 애들은 꼬질꼬질 작아진 옷을 입고 다니겠지.. 그는 직접 하는 요리는 거의 없어도, 메뉴를 함께 신경 쓰고 끼니로 할 조리음식을 주문하며 나머지 (굳이 정의할 수도 없는) 잡다한 집안일도 척척 알아서 해 나간다.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 되어 큰 생색도 없다. 그러다 보니 서로 뭘 했는지 보인다. 자기 일을 상대가 덜어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고 든든하다. 자연스레 나의 살림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 불안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나만 집 안의 일에 있어 일차 책임자였다면 애들 둘 키우는 건 상상불가, 지금보다 훨씬 쩔쩔맬 것이 뻔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되어 약 8년간 소아청소년 환자의 보호자로, 혹은 환자 본인으로 성인 여성과 성인 남성을 상담했다. 특히 5년간 30분 내외의 상담을 해오던 병원이 주거지역이 아닌, 서울 한복판 번화가에 있어 환자 대부분 직장인이었다. 스트레스에 대해 상담을 진행하면 특징적으로 남성 환자들과 달리 기혼 여성 환자들은 꼭 집안의 일이 주제로 나왔다. 남성 환자는 많은 경우 미혼이나 기혼이나 스트레스의 주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혼 남성은 아내가 건드리지 않는 한(?) 결혼 여부, 자녀의 유무가 스트레스 원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예외도 분명 있지만 대략적인 경향은 그러했다. 진료실에서 만났던 수천명 중 아내가 있음에도 자녀의 주양육자인 동시에 가사의 일차 책임자인 남성 분이 딱 두 분 있었는데 그들은 직장 문제보다도 아이들 문제와 집안일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들은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가정과 아이들에게 다른 여자들보다 소홀한 아내에게 불만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무튼 주로 여성 환자들에게 쏠려 그들을 지치게 하는 집안의 일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몸으로 할 일이 많다는 것뿐 아니라 육아와 가사는 정신적으로 소진되는 특성이 있고, 그걸 잘 해내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과 부적절감이 유독 기혼의 여성들에게서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니 어떻게 하면 이 현상을 이해하면서도 이 환자들을 도와줄까 고민이 깊어갔다.

진료실에서 육아, 가사 등 집을 돌아가게 하는 모든 일의 총 책임자 역할이 버겁다는 기혼 여성들이 굉장히 많다. 그녀가 임금노동을 하든, 안하든 집안 운영의 책임자로서 가장 밀접하게 아이들과 부대끼며 필요한 음식이나 생필품을 구매한 뒤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차리느라 정신이 없다고 하며 가사 허드렛일도 많아지고 짬짬이 필수 정보를 모으며 가정이 잘 돌아가게 하려는 과정에서 어느새 자기는 없어지고 번아웃되었다는 단골 레퍼토리. 가족구성원, 특히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거나 그녀 스스로 소진되어 버린 경우 죄책감과 좌절감에 진료 중 눈물을 보이는 환자도 여럿이다. 집안일의 일차 책임자는 기업 CEO처럼 명예롭지도, 근사하지 않으며 적지 않은 가정에서는 성인인 배우자까지도 집안일을 더 만드는 통에 어쩐지 지쳤을 때는 이보다 서럽고 외롭고 고된 노동이 없다. 넓은 의미의 집안일은 ‘혼자 잘해내려면’ 분명 과부하가 걸리는 노동이다. 그녀들에게 ‘집안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라’는 쉬운 조언은 무책임하게 들리곤 한다. 왜냐하면 집안일에 손을 놓으면, 살림을 관장하는 일차책임자에게만 나쁜 결과가 생기는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 특히 아이들에게 나쁜 결과가 생긴다고 여겨지므로 부담을 내려놓는 것은 비난과 불안을 견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가정의 가사노동이 한 명에게만 편중되어 있으면, 그 가사노동 책임자에게 그저 ‘집안일에 덜 관여하고 대충하시라’ 말해봤자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때 버거운 집안일 책임을 분담할 배우자가 있는지, 물리적으로 부재한지 뿐 아니라 배우자가 집안일에 대해 자신의 일이라 여기는지,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고 관심을 두고 있는지 확인해야 된다. 유자녀 기혼여성들은 맞벌이 혹은 여성 외벌이인 경우에도 집안일을 훨씬 많이 하고 있다고, 분담이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배우자와 집안일 책임을 분담하려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서운하고 외로워진 기혼 여성이 있고, 그녀의 남편 역시 마음이 편안할리 없다. 남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부정적인 감정을 옴팡 뒤집어쓰니 집이 답답해지고, 화가 나 있는 배우자와 상호작용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한 가운데 가족으로부터 고립되어 자기가 그저 ATM처럼 취급당한다며 억울해 한다.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중된 사실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남성학자들과 달리 미 여성학자들의 제1저자 논문 비율이 팬데믹 시기에 뚝 떨어졌다는 씁쓸한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이렇게 집 안의 일은 매우 성가시고 굵직하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면이 많으며 집중을 분산시키고 집 밖의 일을 처리할 에너지마저도 소모시키는 특성이 있다. 멀티태스킹은 기본이며 육체적 노동, 감정노동 다양한 기능을 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저평가 되어 있고 가족구성원의 인정에 기대거나 의미와 보상을 알아서 창출해야한다. 여성들의 두 번째 일터인 집안의 일은 유급노동판을 떠나 무급으로 치러지며 감히 ‘노동’이라고 말하기 천박하다. 그 것은 돈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는 일이어야 하고, 사랑과 이해를 담아 기꺼이 헌신하는 영역이어야 하기에 계산적으로 따지고 요구하면 안 되는 일처럼 다루어졌다.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만나는 많은 기혼 여성들이 ‘집안일’로 병이 날 지경이라니 어쩌랴.. 그 기혼 여성들의 메마른 마음은 또한 아이들과 배우자에게도 크게 악영향을 미친다. 내가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환자 개개인을 상대로 지지와 조언을 해주면서도 늘 걸리는 점은 사회문화차원의 변화야말로 정말 치료적일 것이란 믿음이었다. 여자인, 남자인 나와 당신이 함께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정신건강에 기여가 훨씬 크지 않겠는가.

여성, 특히 자녀가 있는 기혼 여성이 집안과 밖에서 겪는 정서적 경험이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치부되어 드러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논란이 왜곡되거나 죄책감과 피해의식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집안일을 경험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오해가 풀릴 수 있고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가사와 돌봄노동에 대한 각 가정의 생활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경험과 인식의 차이를 줄이고 사회구성원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권윤영 (정신과 의사) webmaster@parang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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