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의 생활실험3] 아띠 엄마의 코로나 우울증 극복기 3
가족 통장에 추억을 담자
2021-08-25
지난 주말 남편은 퇴근길에 따끈한 통닭을  들고 집으로 왔다. 지글지글 천천히 돌아가는 빨간 조명의 전기 화로에서 막 꺼낸 먹음직스러운 통닭이었다. “이거 먹고 영양 보충해서 공부할 때 졸지마라.” 남편은 지쳐있을 막내에게 우스갯소리를 하며 통닭을 건넸다. 아이는 모처럼 옛날 통닭을 먹게 되어 즐거운 듯 함박 웃음을 띤 채, 도란도란 얘기도 하며 함께 맛좋은 통닭을 먹었다. 코로나 4단계로 방콕 생활을 하던 청소년도 이렇게 먹는 재미가 있어 그런지 그럭저럭 지루한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의견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가족들의 화합을 위한 ‘아이디어 내기’가 가장 좋은 방법임에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가족들 각자의 직장과 학교가 속해 있는 지방이 다르기에 주말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듣는데,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는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관심이자 배려였다. 서로가 떨어져 있으니까 아프거나 다쳤을 때, 또는 각자가 속해 있는 장소에서 여러 사건으로 힘든 상황이 닥칠 때 혼자 이런 일을 겪으면 더욱 우울해 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좀 더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서로 고민하면서 의견을 내 보기로 했다. 통닭 두 마리에 착안해서 반짝이며 나온 의견은 ‘배려 통장 만들기’였다. 퇴근길에 통닭을 들고 오신 아빠의 배려로 가족들이 맛있게 통닭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처럼 가족들을 위해 한 가지 선행을 하는 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배려를 모아두면 이는 좋은 추억이 된다. ‘아이디어 통장’에 모인 배려는 마음속에 가족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는 결국 아이들이 크면 느낄 수 있는 여유와 넉넉함을 선물할 것이다. 가족 구성원의 배려로 쌓아 가는 통장은 언제나 열려있고 누구나 적립할 수 있다. 만일 서로가 소원하거나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마이너스도 되는 통장이다. 물론 통장에 구체적인 수치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삶의 만족을 위한 행복한 추억을 담는 통장이 있다는 것, 가족을 위한 배려통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맘에 드는 아이디어였다. 가족 구성원들을 배려하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게 좋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행동을 하면 각자의 배려 통장에 각자가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기에 결국은 서로를 위하는 통장이었다. 이렇듯 든든한 통장을 마음에 담고 우린 공원에서 산책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운 주를 맞이하기 위한 재충전의 주말을 보냈다.

이렇게 가족들에게 ‘배려 아이디어 통장’을 선물한 멋진 남편은 월요일 새벽, 할 일이 많다며 회사로 일찍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저녁 6시가 되어 전화가 왔다. 애써 뭔가를 감추는 듯한 목소리로. 지금 줄을 서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였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줄을 왜 섰는데? 남편은 다른 얘기는 대충대충 하면서 사람이 참 많다고... 요새 코로나가 극성인게 맞나보다는 말을 자꾸 했다. 결국 결론은 지난주 수요일에 식사한 식당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날 식사를 함께 한 동료들과 함께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줄을 선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내일 아침까진 결과가 나올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모두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니 그런 모순이 어디있나... 남편의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밀접접촉자’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단순 밀접접촉자는 2주간 격리이지만 만일 남편이 확진자가 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급변할까? 우선 집으로 방역요원이 올 것이고, 온 집안을 소독하겠지. 코로나 선별검사소에 가서 아이도 확진이 되면 이제 개학인데... 아이 학교의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되고 전교에 우리아이가 확진자라는 소문이 퍼질텐데... 우리는 모두 격리를 당하고 코로나 해일이 몰아치겠지. 남편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치킨의 고소한 냄새가 뒤엉키면서 우리 가정에 휘몰아 칠 코로나 여파를 상상하며 나는 밤새 잠을 설쳤다.

  작년 이맘때 나는 남대문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 골목골목 사람들은 상가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도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평소에는 손님들에게 쥬스나 아이스 커피도 권했던 점원들도 옆 사람과 얘기도 안하고 비말이 튀지 않게 물도 한잔 안 마셨다. 손님이 오면 웃으면서도 멀리 떨어졌다.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물건만 팔았다. 나는 스카프를 사기 위해 단골집에 갔는데 친절한 주인은 내 얼굴을 보며 미소 띤 얼굴로 열심히 물건을 골라주고 덤까지 주었다. 친절은 좋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녀가 얘기를 하면서 쉴 새 없이 마른기침을 했던 것이다. 그날 내 핸드폰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만일을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2주 동안 자가 격리를 했던 기억이 났다. 코로나에 걸리면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고통보다도 사회적 낙인효과가 더 무서운 세상이다.

교회에서도 확진자가 나온 적이 있다. 나와 가까운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모두 음성이 나왔지만 교인 중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오프라인 예배가 중지되었다. 대구 신천지, 이태원, 홍대 클럽, 특정종교와 특정지역, 이주민, 성소수자...꼬리에 꼬리를 물고 편파적인 이야기들이 천일야화처럼 끊이지 않고 나왔던 기억이 났다. 평소에는 말하지 못했던 깊은 혐오와 차별의 눈초리가 코로나 19의 확산에 따라 일파만파 퍼졌다. 한번 코로나 환자가 나온 상점은 아예 손님이 없다. 보이지 않게 이러한 집단과 개인들을 사람들은 기피하고 거부한다. 이해는 된다. 한번 걸린 곳에서 다시 안 걸리라는 법이 없으니. 그러나 확진자를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문제이다. 마치 감염이 된 이유가 100% 그들의 책임인 것처럼 말이다. 혐오의 눈초리, 한국사회의 차별의식이 전염병을 매개로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낙인 인식도는 매우 높다. 실제로 학부모와 상담하다가 코로나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진 학원 선생님은 퇴원 후 아예 학원에 다시 발도 못 붙이고 직장을 바꾸게 되었다. 이렇듯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감과 우울증은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니 이런 것이 정말 미칠 노릇이 아닐까?

  다음날 아침, 남편의 상황이 밝혀졌다. 작은 음식점에서 같은 시간 옆 테이블에서 먹은 확진자 때문에 불안에 떨었던 동료들도 모두 음성이 나왔다. 남편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다행이라며 전화를 했다. 만일 자신이 걸리고 우리들도 걸렸다면 이제 개학이라서 신나게 학교를 가던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을 하는 남편의 말을 들었다. 나도 그랬어. 나는 비로소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우주까지 펼쳤던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면서 한숨도 돌릴 겸 아이와 공원을 걷기로 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만약 아빠가 확진자가 되고 우리들도 확진자가 되었다면 너는 어떤 생각을 하겠니? 학교에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텐데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아이는 말했다. “전 학교에서 뭐라고 하든 아무 상관도 안할 거예요. 그 대신 우리 가족들이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배려통장을 채워나가야죠.” 뭔가 이 아이디어는? 아이의 대답에 나도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 아무 생각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겠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낫기를 바라는 응원을 하겠다. 왠지 코로나 바이러스의 가벼운 전파력을 덮는 든든한 메시지였다.

  물고기는 분수로 목욕을 하고 소금쟁이는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 열심히 노는데 우리는 벤치에도 못 앉고 운동기구도 못 만지고 K94 마스크를 쓰고 걷는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의 삶, 그로인해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은 어떨까? 갑자기 내가 그들의 가장 친한 이웃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마 화창한 계절에 핀 절망의 꽃과 같은 심정일 거라고. 가족의 배려통장을 생각하면서 이웃에게도 좀 더 친절하게 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배려통장은 이웃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더욱 진실로 대하는 세상은 남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서로를 믿고 위로하며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남편의 뜻밖의 소식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대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을 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 전기구이 통닭사진 (무료제공)


▲ 관악구 제공 (신문에서 캡처)

 

홍한별 기자 honguu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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