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청년, 왜 한국사회를 힘들어하는가?
위기의 여성청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청년들이 번아웃되었다. 진료실에서 만난 청년들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파릇한 생기가 없다. 저성장 그늘, 능력주의 신화에 쪼그라든 청년들을 더욱 내몰았던 것은 코로나였다. 통계상 코로나 시대에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일터에서 내쫓긴 건 20대 여성들이다. 젊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특성이 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핸디캡이라 생각한다. 최근 치솟는 20대 여성 자살률처럼 내 진료실을 찾는 여성 청년도 매우 늘어났다. 약과 상담으로 초기 증상은 완화가 잘 되는 편이지만 뒤따라오는 큰 문제는 그들이 처한 고된 현실이다.
코로나 19는 여성청년을 사회에서 먼저, 빠르게 지웠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기존과는 전혀 다른 노동환경을 요구한다. 할 수 있는 한 대면은 최소화해야 하며, 회사가 아닌 집에서 업무를 보는 게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게 됐다. 그렇게 팬데믹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고대면 혹은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일자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노동할 곳은 차차 사라졌다.
지난달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1년간 남녀 임금노동자는 작년 대비 10만 8천 명 감소했다. 그중 여성은 5만 7천 명, 남성은 5만 1천 명 감소해 남성보다 여성의 일자리 감소가 더 컸다. 그 면면을 좀 더 들여다보면 더 심각하다. 코로나 이후 퇴직한 여성의 41.6%는 회사의 휴·폐업, 해고 등으로 일자리가 사라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20대 여성은 다른 연령대 여성보다 감염병 위기가 취약한 일자리에서 퇴직한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 시기 퇴직한 20대 여성 5명 중 1명은 숙박음식점업, 5명 중 2명은 서비스·판매직이었으며 비필수·고대면·재택근무가 불가한 일자리에서 그만둔 비중도 다른 연령대 여성보다 더 높았다. 즉 코로나로 인한 여성 일자리 위기는 기존 노동시장의 성별화된 이중구조와 더불어 감염병 확산에 취약한 일자리 특성이 결합 돼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규모 대면 업종 사업장이나 임시·일용직 여성일수록 정부의 일자리·소득 지원 정책의 수혜율도 낮았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운 상황에서 실업급여와 고용유지지원금은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 노동자의 위기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뒤집힌 마시멜로 실험
'마시멜로 실험'은 600여명의 3-5세 아동에게 마시멜로를 하나씩 주고 15분을 기다리면 하나 더 주겠다고 약속한 뒤 행동을 관찰한 실험이다. 이때 마시멜로를 바로 먹어버린 아이들에 비해 기다린 아이들은 커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이 현상에 대해 자제력이 성공의 조건이라 결론지었었다.
그런데 최근 연구는 50년간 진리로 여겨지던 이 명쾌한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마시멜로 실험을 다시 해보면, 마시멜로를 먹은 시점과 성취는 관련이 없었다. 다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바로 먹는 경향을 보였다! 자원이 제한적일 때, 기다림은 곧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마시멜로를 눈앞에 두고도 15분간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은 자제력이 아닌, 그들의 ‘양호한 사회경제적 조건’ 덕에 높은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부족한 마시멜로
한국은 선진국이라면 겪는 경제적 저성장 구조에 놓였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예전에 비해 소박해지고 전문직업인, 공무원이나 교사 등 안정적인 직종에 사람이 몰리는 시대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저성장, 양극화 그늘에서 ‘적당히, 평범하게 살기에도’ 벅찬 청년들이 보인다. 기본 검정시험만 서너 개, 학위나 몇몇 자격증은 당연하고 그것도 모자라 더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스펙을 쌓아서 부족한 양질의 일자리를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게임이 과열될수록 규칙이 중요해지므로 청년들은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청년들은 마시멜로를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다른 이가 마시멜로를 채갈까봐 늘 마음을 졸여 쉽게 방전되고, 기회를 놓치면 기회를 차지한 이에 대한 원망과 패배감에 빠진다.
‘능력주의’만큼은 ‘공정’할 것이라는 착각
게다가 20대들의 가시밭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능력(만능)주의meritocracy다. 공평한 기회 위에서 누구나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개념인데, 예전 폐쇄적 신분제를 극복하기에 계층 이동을 허용한 능력주의는 꽤 유용했었다. 그러나 점점 능력주의는 유연함을 잃고 새로운 신분제를 공고화하는 개념이 되어간다. 효율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능력으로 인간을 줄세우는데, 모든 이의 출발선이 제로일 수 없을뿐더러 능력이라는 것이 명확한 기준만으로 평가할 수 없고, 능력 우위의 승자가 자원을 독식하는 게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얼마나 심한가!)
여기서 사회과학적 통찰을 하려는 게 아니고 능력주의의 심리적 측면이 20대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유해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자기 ‘노오력’으로 보상을 얻어냈으니 그 열매를 독점하는 게 당연하다는 오만함을 가지게 되고, 패자는 도태된 책임을 개인이 옴팡 뒤집어쓰고 수치심과 모멸감을 감내해야 한다. 루저가 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보통의 청년들은 저성장 사회에서 자기 자리 찾기도 빠듯하다. 대부분 청년들이 능력주의적 관점에서 패자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안고 있다.
승자의 마음?
불과 반년전, ‘의사파업을 반대하는 분들 풀어보세요’라는 제목의 카드뉴스를 의협에서 게시해 뭇매를 맞았다.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가 보기로 제시되었다. 노골적인 시험성적 자부심이 담뿍 들어간 이 카드뉴스는 보통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의사들은 승자의 오만함으로 인해 국민에게 굴복이 아닌 협조를 구할 때의 태도를 정녕 모른 채 비장하게 집단반발을 이어갔다. 이렇게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높은 보상(경제적 기회, 사회적 존경과 인정 등)이 오롯이 자기 고생으로 이룩한 성과라 여기기에 공공성을 요구받으면 시혜적으로 베푸는 건 가능하지만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예비 패자들의 위기감
‘인국공 사태’, 대통령 공약 중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에 가장 반대한 이들은 바로 청년층이며 사내 정규직이다. 이 현상을 보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청년들이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논란의 사실관계 자체가 언론에 의해 왜곡된 점을 제외하고도)를 내가 먹을 마시멜로가 늘어나는 계기로 바라보기보다는 내 마시멜로를 다른 이가 먼저 차지한 걸로 이해하니 얼마나 패배감이 들고 원망스럽겠는가. 가난한 집 마시멜로를 다시 떠올려보자. 기다림에서 파생될 수 있는 공감, 배려, 연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학창시절 성적, 자격시험, 입사시험이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라 여기는 청년들이 나만큼 노오력하지 않은 자가 나와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청년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한 꼰대가 말한다. ‘요새 청년들 너무 자기밖에 모른다’. 청년들에 대한 공감 없이 함부로 말하다가 경쟁에 지치고 배고픈 청년들의 열패감을 자극해 원한으로 돌려 받으리라. 그래서 청년들은 그 꼰대를 공격하는 또 다른 상꼰대-사실 청년들에게 더 유해할 수도 있는-에게 위안을 얻는다. 미국 민주당의 엘리트정치에 분노한 ‘루저’들이 세운 대통령이 트럼프라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섬뜩하게 다가온다.
‘어떤 것’이 공정한가
능력주의가 창창한 청년들을 서로 적으로 만든다. 같은 룰을 적용받을, 나와 비슷한 처지의 경쟁자에게 가장 공격적이다. 반면, 애초에 적용받는 룰이 다른, 경쟁상대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재벌이나 압도적 권력자에게 비교적 우호적이며 선망도 보인다. 물론 ‘공정’은 우리 사회가 수호해야 할 가치다. 문제는 ‘어떤 것’이 과연 공정하냐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로 대표되는 특정 집단을 배려하는 규칙이야말로 공정이라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런 배려야말로 불공정 그 자체라 말한다.
남녀 청년들의 동상이몽
‘공정’을 화두로 여성과 남성은 좁은 게임판에서 극렬하게 대치한다. 그렇게 대치하도록 언론도, 정치권도 부추긴다. 불이 잘 붙는다! 이대남과 이대녀는 서로 배려해야 할 대상이 아닌 적은 자원을 놓고 치열하게 맞붙는 경쟁자기 때문이다. 남성 청년은 이전 세대와 달리 ‘가부장제의 혜택을 누린 적 없는 자신들이 왜 ’배려‘해야하는지’ 억울해하며 진정으로 남성이 차별받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리켜 과연 배려라 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젊은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룰을 왜곡하는 반칙이라 여기기에 분노한다.
남성 청년들이 분노한다면, 여성 청년들은 혼란스럽다. 자신의 위치가 능력주의의 수혜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성별을 핸디캡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시험 위주의 채용 기회를 얻는다면 능력주의의 수혜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다보면 시험성적이 아닌 다양한 변수들이 ‘능력’을 결정짓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성별이 걸림돌로 느껴지게 된다. 또한 여전히 사회적으로, 결혼 후 남성의 능력에는 큰 저하가 없는데 여성의 미래 능력에는 크게 저하가 있을 것이라 가정된다. 결혼 및 출산의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보조적, 예비적인 인력으로 취급된다. <82년생 김지영>이 MZ세대 여성들 사이에서도 그토록 주목받았던 것은 김지영에게서 자기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인간 가치를 매기다 보니, 미래에 자기 능력을 손상시킬 결혼, 임신과 출산이 특히 여성 청년들에게 꺼려진다. 아내와 엄마가 된 여성들이 임금노동 시장에서 멘탈의 반쯤은 집안일과 애들에게 가 있어 ‘시장에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알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능력’의 빛나는 가치와는 달리 주부의 역할과 돌봄노동 및 가사는 ‘집에서 노는 것’이라 폄훼되는 현상은 오래되었다. 다만 최근 교육수준이 높아진 여성들이 이젠 그런 낮은 가치를 견디기 어려워하며, 여자들이 ‘자의적으로’ 돈버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할 것이라는 가정, 출산 후 주부가 되어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가정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성 청년들은 시장에서 현재의 능력뿐 아니라 미래 잠재적 능력까지 평가될 때 여전히 남성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맥락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출발선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남성 청년들은 여성들의 미래 가치가 떨어지는 맥락보다는 어쨌든 여성들이 결혼 출산을 겪고 나면 시장에서 잠재능력이 떨어지는 건 팩트이므로 그에 따라 남녀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긴다. 아예 문제점에 대한 진단이 다르기에 공정한 규칙에 대한 개념 또한 다르다.
여혐과 남혐에 소모되는 감정
남성청년들도 처지가 힘들다보니 요새는 데이트할 때도 공동 통장을 만들고, 자연스레 ‘연애 비용 반반’을 외치므로, 여성청년들은 예전 세대보다도 경제적으로 남성들에게 의존하기 어렵다는 걸 연애 때부터 체감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을 주로 남성이 부담하는 현상이 있어왔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남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남성청년들은 여성청년들이 ‘반반’을 조롱하면 ‘알파메일alpha male’이 아니라는 열패감이 자극되어 화르륵 분노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성청년들 사이에서 반작용으로 ‘놀고 사치하며 남자 경제력에 빨대 꽂는 여자’에 대한 혐오를 더 세게 드러낸다. 이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성차별도 겪지 않았는데 남성 덕에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한다고 엄살피우는 (맘충이지만 맘충이라 대놓고 차마 혐오표현은 할 수 없는) 불편한 존재이다. 그래서 남자로서 경험했던 고생담을 엮은 책이 맞불 놓듯 나오기도 하고 누가 누가 더 힘든가 겨루는 대결처럼 인터넷상 여론이 흘러가기도 한다. 남녀 서로의 힘든 경험을 비하하며 혐오와 분노로 감정이 소모된다. 실제로 남성청년들 상담중에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불만스러운 시각을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여성청년들이 갖는 불안 하나 더
더불어, 많은 여성 청년들은 보통의 남성들이 자기 생존과 안전을 직접 위협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 같다. 특히 몰카, 다크웹 이슈, n번방 사태가 일어나면서 익명의 수십만 남성이 그런 컨텐츠를 죄책감 없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이 매우 증폭되었다. 게다가 그들 정체를 영영 알 수 없어 어떤 특정 소수의 남성이 아닌 바로 옆 내 이웃 남성마저 의심해야 하는 상황, 피해자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위협감이 남성에 대한 원망과 혐오, 그리고 냉소를 더욱 쏟아내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는 주로 자기 신체의 기능적 발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자는 몸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성의 몸이 극단적으로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방식에 남성이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성들은 자기 일인 양 감정이입하며 생생한 공포를 느낀다. 또한 상대적으로 근력이 약하고 작은 체구의 사람과 강한 근력에 큰 체구를 가진 사람의 경험과 물리적 위협에 대한 경계심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남성과 신체조건이 다른 여성들이 자연스레 인적이 드문 길을 가다가 뒤따라오는 남성에게 별 근거도 없이 공포를 느끼는 것이 (남성들은 정말 불쾌하겠지만)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반응이다. 생존에 위협,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현실이 모두 중요한 젊은세대의 여성에게 더더욱 공포를 확산시킨다. 이러한 공포는 성 관련 피해와 가해에 몰두하게 해 때로는 무리한 상상적 위협을 증폭시켜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사실은 여성들, 피해자의 큰 불안을 못되게 이용하는 세력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김학의 사건에서 보듯 권력자의 성폭력 사건이 보수세력에서 일어나면 조용하게 지나가고, 심지어 진상을 파헤치는 시도가 가해자에 의해 방해되고 언론은 피해자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현재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진보 진영에 불리하게 미투이슈가 작용하는데, 피해자 및 여성들의 정당한 불안을 이용하고 부추겨 분노하게 한 뒤 정당한 의문제기와 진상규명을 정치진영 논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권 윤영 (정신과의사) webmaster@parang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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