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진보세력의 새로운 좌표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하여...이래경(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참다운 진보는 국민의 행복과 풍요를 위해서 시장경제 중요하게 여겨야
윤호창 기자
2024-01-19 오후 2:50:53

▲ (사진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

5년 전 탄생했던 참여정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정권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기존의 어떠한 정권보다도 개혁과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데 있어 기득권의 견제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오로지 국민의 이익에 복무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정부였다.

참여정부는 시민사회의 열렬한 지지와 기대를 등에 업었고 수십 년 간 농민과 도시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낸 세계 12위권의 탄탄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출범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전략 경제사회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와 진보도 구별 못한 오만과 무능 정권으로 낙인 찍혀 보수기득권세력 일반시민 그리고 진보그룹 모두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

사실 참여정부의 주류인 얼치기 개혁주의자 스스로를 좌파라고 착각한 신자유주의자 궤변론자들 이에 편승한 고급관료들이 지난 89년 이후 민주화의 성과인 참여정부를 포말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원통하게도 민주화 시대를 함께 했던 정통민주인사들과 진보인사들조차 일반시민들에게 참여정부의 주류들과 함께 공범으로 오해 받아 오만과 무능의 손가락질을 함께 당하는 딱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보세력에게는 참담하고 가혹한 현실이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진보진영이 내디딜 이번의 발걸음은 단순한 정권교체나 형식적인 의미의 정치적 민주화가 아닌 새로운 미래좌표로서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가져야 한다.

적극적 실질적 의미로서의 민주진보운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

-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한 정치적 결정에 일반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 (풀뿌리 민주주의의 강화 지역 기반 시민운동 수구적 언론 매체에 대항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 대중과 결합된 정치결사체 등)

- 사회 경제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 조건 (노동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 가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공정한 기회로서 교육을 받을 권리 건강할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 등)

- 문화적으로 각자 자신의 개성이 존중되고 가치를 인정받고 다양한 기회를 향유하며 이를 발전시킬 조건

상기의 내용은 18-20세기 간에 유럽사회가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이념적 대립과 참혹한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 낸 일반적 합의의 토대이기도 하다.

유럽이 겪은 지난 세기의 역사를 근대(현대)과정이라고 칭한다면 한국사회에서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를 근대(현대)기획을 완수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근대기획과정은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독립된 국가로서 체계를 갖추는 건국기

-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경제부흥기

- 위에 언급한 형식적 민주화의 시기

- 그리고 이후 과제로 삶의 내용과 질을 확보해 가는 복지국가시기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황 발생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 시기는 건국이라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폭압적 파쇼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경제부흥과 성장의 물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일구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80년 이후는 독재정권의 잔재를 씻어내는 일차적 민주화의 과정이었다. 87년 민주화의 쟁취는 민주 기반을 확고히 하여 이 땅에 독재자가 다시 태동될 수 없는 비가역적 획을 긋는 주요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재의 시기는 근대기획과정의 상황과제인 삶의 실질적 내용과 질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복지국가 한국을 향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 대다수 국민의 희생 속에 소수의 부자를 위한 사회로 나가느냐를 결정짓는 보수정치세력과 참다운 진보진영 간 치열한 경쟁의 시기다.

보수정치집단들은 신자유주의를 전폭 수용한 시장기제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탁월한 경험과 능력으로 국민성공시대를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여정부의 무능과 오만에 염증을 느낀 국민 다수는 현재 보수정치집단의 이러한 주장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 무슨 변명이 있으랴!

이제 참다운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차분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처럼 오만과 화술로서가 아니라 고백과 실천과 국민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 시기에는 비정규직 문제와 가난과 실업 등 민생 문제를 모든 것에 우선하여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체제에 포섭되고 구조화과정을 거쳐 실업과 워킹푸어(working poor)를 천만 명에 이르도록 양산해냈다.

하루하루 삶이 고단한 서민과 희망을 상실한 빈민들에게 미래가 없이 허망하게 오늘을 소비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는 혀 속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싹 터오는 희망이며 노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진보는 국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 함께 손을 맞잡고 희망과 어깨동무를 하며 상생과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음과 실천과 과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참다운 진보는 국민들의 행복과 풍요를 위해서 당연히 시장경제를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그러나 시장을 위한 시장 소수 자본가와 투기꾼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민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방도로서 소수를 위한 가짜경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진짜경제와 좋은 성장을 위해 사회적으로 통제 가능한 혁신적 시장경제를 창달해야 한다.

시장기제는 자신의 성취와 동시에 공공의 가치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복무하고 작동해야 한다. 분업은 협업과 협동을 전제한다. 개인이라는 사적 존재는 이웃이라는 공공을 통해서 확인되며 이웃과 따뜻한 손을 잡음으로서 행복과 상생의 의미를 추구해 간다. 한자어로서 人間은 그 자체로 진보이며 진실이다.

보수는 개별적인 권리와 사적인 재산권을 최상의 가치로 받들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허황된 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다가 급기야 시장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모시는 신자유주의에 이르렀다.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익실현을 위해서라면 비인간적인 수탈과 기만도 반혁명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기본 속성이다.

이들에게는 공공의 가치와 질서는 사적 지위와 이해를 보호하는 장치로서만 존재하는 장식물이다. 그러나 이미 신자유주의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이 미국을 위시한 선진제국의 체제를 뒤흔드는 심각한 불안정과 위기를 증폭시켜왔음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선봉장격인 Financial Times 수석해설위원인 Martin. Wolf 조차도 이러한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참다운 진보는 이미 승리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진보는 수치놀음인 경제성장율을 앞세워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양적인 수치는 허상이라는 것을 모르면 진보가 아니다.

6-7% 성장율을 위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한다면 MB정권은 중원 평정의 야욕에 불타 무리한 대운하 공사를 추진했다가 월왕구차에게 치욕스런 죽음을 당한 오왕부차의 운명을 예고할 뿐이다.

불평등 분야의 전문가인 아마티아 센 교수는 이렇게 질문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제성장율이냐고? 경제는 자원의 효율적이고 올바른 운영과 공정한 배분의 과정이다. 그러한 결과로 나온 성장율이 7%가 아니라 다만 4-5%라도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가난한 서민들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4-5%의 참된 성장은 투기꾼과 사기꾼이 합작한 7% 성장보다 열배 백배 값진 것이다. 양적 성장보다는 성장의 내용과 질 즉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를 중시해야 한다.

참다운 진보는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OECD 국가 중에 GDP 중 복지부문의 비중이 10% 미만인 국가는 한국(7-8%)과 멕시코뿐이다. 손가락질을 당하는 미국조차도 복지부문이 차지하는 GDP 비중이 15% 선을 넘고 있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경우 25-30%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조차 사회투자라는 이름으로 복지부문을 시장논리로 난도질을 해놓았다.

한국사회 만큼 다양한 온갖 종류의 위험이 도처에 숨겨진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 국민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위험을 반드시 국가와 사회가 함께 나누고 분담해야 한다.

출산 육아 교육 취업 주택 건강 생계 노후 장애 등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 조건이 보장되고(national safety-networks)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고(justice in society) 각자의 가능성이 최대한 실현될 수 있는(spring board in potential)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쟁취하고 전진해야 한다. 이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나라가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유연안전체계(flexicurity)를 실천한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삶이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고 변화와 혁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필자는 연전에 한국을 방문한 독일인 현장노동자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국가가 자신의 노후와 건강을 책임져주기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부러웠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복지국가의 모습이 아니던가? 반대로 자신의 삶에 항상적으로 위험과 불안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위험을 회피하고 이기적으로 처신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공공선과 사회적 연대는 기대하기 어려우며 약육강식의 살벌한 정글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제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대답은 내려졌다. 우리의 명백한 상황과제는 역동적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실현이다. 삶의 기본적 조건인 ‘보편적 복지’와 공정한 기회와 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는 ‘능동적(적극적) 복지’의 조건 위에서만 사회적 연대와 인본주의가 꽃 피고 사회경제체제가 역동적 혁신적으로 작동하고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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