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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김영철 마을대학협동조합전국연합회준비위원장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지난 5월19일 일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44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주간에 <일하는 예수회> 정기총회와 모임이 열렸다. <일하는 예수회>가 광주에 모인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우리 모임은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위한 교회운동이었던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해 왔던 목회자들의 모임이다. 민중교회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서 큰 영향을 받아 시작됐다. ◇ 한국민중항쟁의 고유성은 종교적 열정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떠났다가 밤차로 돌아오는 일정을 잡고 광주로 향했다. 프로그램을 보니 주제강사가 김상봉교수였고, 본인의 저서인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한다고 했다.사실 그 글은 김교수가 지난 10월에 경남대 K-민주주의연고소 학술심포지엄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논문으로 발표되었을 때, 어느 분이 카톡에 올려준 원고를 보고 프린트하여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언젠가 깊이있게 논의해 볼 기회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터여서 반가웠다. 고속버스로 내려가는 중에 2년 전 광주다일교회에서 열린 종교개혁기념 강연회에서 ‘교회, 정치를 말하다’는 강연을 유투브로 들으며 내려갔다. 2시간 30분 가까이 강의와 질의응답이 진행된 내용을 통해 강사의 주된 관심과 강조점을 미리 맛볼 수 있었다. 광주에 도착해 약속된 식당에 도착하여 김상봉교수와 직접 대면하여 처음으로 인사했다. 나중에 우리 모임 장소인 5.18교육장에서 강의 전 대화하다 보니,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학번에 기독학생회(SCA)와 기독청년회(EYC) 활동을 한 것을 알고 정말 나와는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알고보니 내 고교동기와 대학동기임을 알고 한 다리 건너는 친구가 되기에 더 반가웠다. 김교수는 책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자신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결부하여 담담하게 알려주었는데, 너무나도 공감이 가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 것과 같은 통찰력을 얻었다.본인이 십 수년 전에 광주에 내려오면서 연구하게 된 5.18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민중항쟁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이를 점차 한국의 근대 민중항쟁의 역사(부마항쟁, 전태일열사의 분신, 4.19혁명, 4.3제주민중항쟁, 동학혁명)로 확장해서 살펴보니 ‘한국민중항쟁의 고유성이 종교적 열정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믿음이 새로운 윤리와 실천을 낳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운 최제우가 시작한 동학에서 이를 잘 볼 수가 있다. 영성이란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이웃에게 확대하여 하나됨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바로 종교적 열정이 바탕이 되어 영성에 기초한 사랑으로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진보운동, 왜 힘을 잃어가고 있나? 하지만 무신론적 사회과학에 기초한 세속적 운동은 이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하여 점차 메말라지고 권력투쟁에 매몰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진리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여서 보편적 지지와 지속가능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진단이다.그런데 이러한 진보적 영성은 종교 간의 차이도 뛰어넘는다. 김교수는 유교에 영향받은 최제우, 천주교에 영향받은 안중근, 불교에 영향받은 만해 한용운, 그리고 기독교에 영향받은 전태일의 영성이 일맥상통한다고 보며, 이들의 영성은 종교를 뛰어넘어 하나의 깊은 영성을 나타내 준다고 강조했다.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백할 때, 한국인들은 최제우의 하나님(상제), 한용운의 하나님(님), 전태일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의를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이 났다. 하나는 민중교회를 하면서 우리가 많이 하던 이야기이다. 지역주민들이 민중교회의 탁아소(어린이집)나 공부방(지역아동센터)과 같은 프로그램에는 참여하면서도 왜 교인으로는 나오지 않을까?이를 좀 더 확대하면 카톨릭이 주류이고 해방신학의 본거지라고 할 라틴아메리카에서 보수적인 성령운동 개신교가 판을 치는 것은 무슨 현상일까?앞에서 김교수가 지적했듯이,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이 영성보다는 사회과학적인 운동론에 매몰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나 자신을 비롯한 민중교회 동역자들이 본래 출발한 종교적 영성을 소홀히 하고 사회과학이나 세속적 운동론에 경사되어 한계를 보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8,90년대 기독교운동에서도 일반운동론과 기독운동론의 조화를 위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조화를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도 했지만 점차 종교적 열정에 소홀하게 되었고, 결국은 기독교운동의 고유성보다는 일반운동의 보조적 운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동안 교회목회보다도 마을운동과 교육운동을 통한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에 참여하면서 내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교회의 소중함이다. 마을에 들어가보니 교회에서와 같은 종합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다.사실 교회에서는 좋은 설교를 듣고, 성가대에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고,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교인들간의 친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인적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마을에는 그러한 전인적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찾기 어려웠다.그래서 교회적 훈련방식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김교수의 핵심적 주장과 연결해 보면 모든 사회운동이 기본적으로 종교적 영성에 기초해야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일하는 예수회>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다보니 기독교중심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김교수의 본래 주장은 진보운동 일반에 관한 것이다. 지난해 발표한 논문 제목은 바로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였다.김교수는 한국민주주의의 위기, 특별히 진보의 위기를 영성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과거 진보신당에 합류해 강령 기초 작업을 한 바 있다.그런 경험을 포함해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진보정치를 겪으며 ‘영성의 부재’가 진보정치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영성과 함께 했던 우리의 사회운동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영성, 좁혀서 말하면 ‘종교적 영성’이 이끌어 온 역사이다. 19세기말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영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쟁이었고, 3·1운동도 믿음깊은 종교인들이 대표로 참여해 이끈 거족적 항쟁이었다.“19세기 이래 다른 나라에서는 진보적 정치 행위가 세속주의에 의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운동의 토양이 됐던 것”이야말로 한국 근현대민중운동사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러한 종교적 영성으로 일한 대표적인 두 사람을 저자는 전태일과 서준식으로 예를 든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신의 한쪽 눈을 팔아 착취없는 작업장을 세우려 했고, 그 꿈이 좌절 당하자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으로써 그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서준식은 19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영성이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던 서준식은 옥중에서 기독교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를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해방을 바라는 자”의 모범으로 발견한다. 그는 “유물론적 영성”의 전범이 되었다.그런데 1980년 이후 진보운동은 이러한 전태일과 서준식이 걸었던 영성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리어 목적이 선하다는 확신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무차별하게 정당화하는 가치 전도에 빠지게 되었다.급기야 한국의 진보정치는 영성을 잃어버리고 권력투쟁에 함몰하고 말았다. 이제 이러한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는 영성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김교수의 개인적 결심과 같이 믿음의 회복이 필요한 시대요, 교회나 사회적으로 새로운 믿음, 새로운 케리그마가 필요한 시대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그런 면에서 기독교 운동이나 민중교회가 일반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교회가 가장 사회적 지체그룹으로 치부되지만, 우리가 가진 민중 영성에 기초한 새로운 믿음을 회복한다면 막힌 사회운동을 뚫어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3시간30분이나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 몇 시간 보내고 심야버스로 인천으로 돌아오면서도 마음이 충만하다.강의를 통해 얻은 새로운 통찰력이 내 개인과 <일하는 예수회>, 나아가 한국진보정치의 새로운 비전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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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이명박정부 들어 시장화 공세가 거세지면서 사회공공성운동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이제 어느 집회에서나 이 구호가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걸 보면 사회공공성운동이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그럼에도 왠지 이 운동이 어디선가 머물러 있거나 막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회공공성 의제조차 관성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든다. 사회공공성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공공 재정’에 대해서도 노동운동이 책임있는 대안을 내야 할 때가 되었다.나는 사회공공성운동의 본령은 방어적 성격을 넘는 공세적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공공성은 신자유주의 시장화에 맞서는 의제로서 ‘시장화 저지 반세계화 구조조정 중단’ 등 반대에 머물지 않고 사회공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대안운동의 성격을 함축한다.즉 ‘저지’보다는 ‘강화’가 이 운동의 본령이다. 내가 사회공공성운동이 공세적 운동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근래 사회공공성이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구호로만 머물거나 혹은 선언적 대안으로 안주하는 경향이 보이기 때문이다.‘의료’영역을 보자.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은 오래전부터 무상의료를 주장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무상의료를 달성할 지에 대해선 사실 대답이 없다. ‘부유세를 거두면?’ ‘우리가 집권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질병에 고통 받고 가계가 무너지는 사람들에겐 멀리 있는 이야기다.의료공공성운동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미FTA 조항에서 의료개방을 포함시키지 못하게 한 것도 끊임없는 보험자본과 의료계의 의료시장화 공세에 맞선 것도 노동운동의 투쟁 덕이다.내가 지적하고픈 것은 진보운동이 무상의료를 구체화하는 활동에 무심하다는 점이다.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네가티브’ 방식에 너무 익숙한 탓이다.그 결과 한국의 의료체계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 중환자로 고정화되어 묘사된다. 그것의 실천적 효과는 무엇일까? 사회구성원들이 질병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달려갈 곳은? 무상의료? 아니다. 사보험 시장이다.왜 민간자본이 자신의 상품을 암보험 실손형(본인부담보전)으로 이름 붙일까? 일반 사람들이 중대질환에 대한 두려움 고액 본인부담금에 대한 불안이 핵심 포인트라는 점을 포착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의료공공성운동의 방향은? 당연히 보장성 강화다. 그런데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 없다. 사보험은 시민에게 눈에 보이는 ‘상품’을 전시하는데 우린 ‘주장’만 반복하는 꼴이다.의료시장화를 막는 최선의 길은 의료의 보장성을 가능한 빨리 높이는 일이다. 한국의 의료보장이 과거에 비해선 좋아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돼야 한다. 경중질환에 대한 보장성은 상당히 개선되었다.시민들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점차 건강보험의 효과를 체험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공공성 모델을 현실화할 수 있는 유리한 소재다. 보장성 확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내야 한다.나는 몇 해 전 보건의료노조가 제기한 ‘가구당 월 3만원 더 내면 무상의료’ 구호가 발전되지 못한 게 아쉽다. 매년 연말에 벌이는 건강보험료 수가 협상에서 노동조합이 ‘중대질환 보장성 강화와 보험료 인상’을 한 묶음으로 제안할 수는 없을까?그래서 ‘내년부터 중대질환은 건강보험이 책임집니다. 가구당 연 본인부담금은 어떤 경우든 1백만 원이 넘지 않습니다’라는 주장으로 사회구성원과 소통할 수는 없을까? 이 제안에 대하여 노동운동 내부에 반대 입장이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필요하다. 제발 이런 논란부터 벌이자. 그래야 주장을 넘어 방안이 나올 수 있다.의료 영역에서 보았듯이 노동운동의 사회공공성운동에서 빠져있는 결정적 영역이 재정이다. 공공의료 교육 연금 주거 모두 막대한 돈이 든다.이 돈을 마련하지 않는 한 사회공공성 주장은 공허하고 사회구성원도 이 주장에 크게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 세금이든 보험료든 국가재정을 확대하는 방안을 노동운동이 내놓아야 한다.지금까지 노동운동은 재정 문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거나 혹은 부자나 기업에게 더 거두면 된다고 주장해 왔다. 재정관련 노동조합이 없어서인지 국가재정에 대한 분석자료나 요구자료도 제대로 찾아보기 어렵다.사회공공성 강화는 모두 공적 재정이 필요하다. 요구가 힘을 가지려면 재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방안이 포함되어야 한다. 앞에서 제기한 ‘건강보험’ 예도 그러하듯이 세금이든 사회보험료든 구체적인 인상방안을 제출해야 한다.필요하다면 노동자들이 소득세를 더 낼 수도 있어야 한다. 소득세 인상은 건강보험료 인상보다 더 내부 논란을 야기할 것이다. 피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야 재정의 중요성과 구체적 방안을 절실히 다루게 된다.난 언제가 노동운동이 소득세 인상을 제안하기를 기대한다. 이는 더 많은 소득세를 내야할 계층들에겐 엄청난 압력을 주는 증세운동이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노조간부들이 많을 듯하다.묻고 싶다. 소득세 인상이 내키지 않는다면 왜 노무현정부의 소득세 인하엔 반대했는가? 소득세 인하가 부자 호주머니만 채워주는 것이라면 소득세 인상은 그 역이지 않은가? 세금에 대한 조합원의 부정적 정서를 감안하면 험한 길이겠지만 긴 호흡으로 피하지 말아야 할 길이다.참고로 이 글은 [노동사회] 6월호에 실린 필자의 “관성 넘어서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중 일부를 필자가 요약하여 칼럼으로 다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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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5년 전 탄생했던 참여정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정권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기존의 어떠한 정권보다도 개혁과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데 있어 기득권의 견제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오로지 국민의 이익에 복무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정부였다.참여정부는 시민사회의 열렬한 지지와 기대를 등에 업었고 수십 년 간 농민과 도시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낸 세계 12위권의 탄탄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출범하였다.그러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전략 경제사회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와 진보도 구별 못한 오만과 무능 정권으로 낙인 찍혀 보수기득권세력 일반시민 그리고 진보그룹 모두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사실 참여정부의 주류인 얼치기 개혁주의자 스스로를 좌파라고 착각한 신자유주의자 궤변론자들 이에 편승한 고급관료들이 지난 89년 이후 민주화의 성과인 참여정부를 포말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원통하게도 민주화 시대를 함께 했던 정통민주인사들과 진보인사들조차 일반시민들에게 참여정부의 주류들과 함께 공범으로 오해 받아 오만과 무능의 손가락질을 함께 당하는 딱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보세력에게는 참담하고 가혹한 현실이다.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진보진영이 내디딜 이번의 발걸음은 단순한 정권교체나 형식적인 의미의 정치적 민주화가 아닌 새로운 미래좌표로서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가져야 한다.적극적 실질적 의미로서의 민주진보운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한 정치적 결정에 일반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 (풀뿌리 민주주의의 강화 지역 기반 시민운동 수구적 언론 매체에 대항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 대중과 결합된 정치결사체 등)- 사회 경제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 조건 (노동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 가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공정한 기회로서 교육을 받을 권리 건강할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 등)- 문화적으로 각자 자신의 개성이 존중되고 가치를 인정받고 다양한 기회를 향유하며 이를 발전시킬 조건상기의 내용은 18-20세기 간에 유럽사회가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이념적 대립과 참혹한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 낸 일반적 합의의 토대이기도 하다.유럽이 겪은 지난 세기의 역사를 근대(현대)과정이라고 칭한다면 한국사회에서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를 근대(현대)기획을 완수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한국사회의 근대기획과정은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된 국가로서 체계를 갖추는 건국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경제부흥기- 위에 언급한 형식적 민주화의 시기- 그리고 이후 과제로 삶의 내용과 질을 확보해 가는 복지국가시기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황 발생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 시기는 건국이라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폭압적 파쇼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경제부흥과 성장의 물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일구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80년 이후는 독재정권의 잔재를 씻어내는 일차적 민주화의 과정이었다. 87년 민주화의 쟁취는 민주 기반을 확고히 하여 이 땅에 독재자가 다시 태동될 수 없는 비가역적 획을 긋는 주요한 사건이었다.우리나라가 처한 현재의 시기는 근대기획과정의 상황과제인 삶의 실질적 내용과 질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복지국가 한국을 향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 대다수 국민의 희생 속에 소수의 부자를 위한 사회로 나가느냐를 결정짓는 보수정치세력과 참다운 진보진영 간 치열한 경쟁의 시기다.보수정치집단들은 신자유주의를 전폭 수용한 시장기제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탁월한 경험과 능력으로 국민성공시대를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여정부의 무능과 오만에 염증을 느낀 국민 다수는 현재 보수정치집단의 이러한 주장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 무슨 변명이 있으랴!이제 참다운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차분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처럼 오만과 화술로서가 아니라 고백과 실천과 국민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 시기에는 비정규직 문제와 가난과 실업 등 민생 문제를 모든 것에 우선하여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작금의 한국사회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체제에 포섭되고 구조화과정을 거쳐 실업과 워킹푸어(working poor)를 천만 명에 이르도록 양산해냈다.하루하루 삶이 고단한 서민과 희망을 상실한 빈민들에게 미래가 없이 허망하게 오늘을 소비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는 혀 속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싹 터오는 희망이며 노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진보는 국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 함께 손을 맞잡고 희망과 어깨동무를 하며 상생과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음과 실천과 과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참다운 진보는 국민들의 행복과 풍요를 위해서 당연히 시장경제를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그러나 시장을 위한 시장 소수 자본가와 투기꾼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민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방도로서 소수를 위한 가짜경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진짜경제와 좋은 성장을 위해 사회적으로 통제 가능한 혁신적 시장경제를 창달해야 한다.시장기제는 자신의 성취와 동시에 공공의 가치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복무하고 작동해야 한다. 분업은 협업과 협동을 전제한다. 개인이라는 사적 존재는 이웃이라는 공공을 통해서 확인되며 이웃과 따뜻한 손을 잡음으로서 행복과 상생의 의미를 추구해 간다. 한자어로서 人間은 그 자체로 진보이며 진실이다.보수는 개별적인 권리와 사적인 재산권을 최상의 가치로 받들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허황된 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다가 급기야 시장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모시는 신자유주의에 이르렀다.재산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익실현을 위해서라면 비인간적인 수탈과 기만도 반혁명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기본 속성이다.이들에게는 공공의 가치와 질서는 사적 지위와 이해를 보호하는 장치로서만 존재하는 장식물이다. 그러나 이미 신자유주의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이 미국을 위시한 선진제국의 체제를 뒤흔드는 심각한 불안정과 위기를 증폭시켜왔음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신자유주의의 선봉장격인 Financial Times 수석해설위원인 Martin. Wolf 조차도 이러한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참다운 진보는 이미 승리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참다운 진보는 수치놀음인 경제성장율을 앞세워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양적인 수치는 허상이라는 것을 모르면 진보가 아니다.6-7% 성장율을 위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한다면 MB정권은 중원 평정의 야욕에 불타 무리한 대운하 공사를 추진했다가 월왕구차에게 치욕스런 죽음을 당한 오왕부차의 운명을 예고할 뿐이다.불평등 분야의 전문가인 아마티아 센 교수는 이렇게 질문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제성장율이냐고? 경제는 자원의 효율적이고 올바른 운영과 공정한 배분의 과정이다. 그러한 결과로 나온 성장율이 7%가 아니라 다만 4-5%라도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가난한 서민들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4-5%의 참된 성장은 투기꾼과 사기꾼이 합작한 7% 성장보다 열배 백배 값진 것이다. 양적 성장보다는 성장의 내용과 질 즉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를 중시해야 한다.참다운 진보는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OECD 국가 중에 GDP 중 복지부문의 비중이 10% 미만인 국가는 한국(7-8%)과 멕시코뿐이다. 손가락질을 당하는 미국조차도 복지부문이 차지하는 GDP 비중이 15% 선을 넘고 있다.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경우 25-30%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조차 사회투자라는 이름으로 복지부문을 시장논리로 난도질을 해놓았다.한국사회 만큼 다양한 온갖 종류의 위험이 도처에 숨겨진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 국민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위험을 반드시 국가와 사회가 함께 나누고 분담해야 한다.출산 육아 교육 취업 주택 건강 생계 노후 장애 등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 조건이 보장되고(national safety-networks)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고(justice in society) 각자의 가능성이 최대한 실현될 수 있는(spring board in potential)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쟁취하고 전진해야 한다. 이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나라가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유연안전체계(flexicurity)를 실천한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삶이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고 변화와 혁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필자는 연전에 한국을 방문한 독일인 현장노동자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국가가 자신의 노후와 건강을 책임져주기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부러웠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복지국가의 모습이 아니던가? 반대로 자신의 삶에 항상적으로 위험과 불안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위험을 회피하고 이기적으로 처신하게 된다.이러한 사회에서 공공선과 사회적 연대는 기대하기 어려우며 약육강식의 살벌한 정글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가 그러하지 아니한가?이제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대답은 내려졌다. 우리의 명백한 상황과제는 역동적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실현이다. 삶의 기본적 조건인 ‘보편적 복지’와 공정한 기회와 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는 ‘능동적(적극적) 복지’의 조건 위에서만 사회적 연대와 인본주의가 꽃 피고 사회경제체제가 역동적 혁신적으로 작동하고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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