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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는 공중(The Public)에게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다.” 『영웅전』의 저자인 로마시대 그리스인 철학자 플루타크의 말이다. 무려 2천년의 세월을 넘나든 이 철학자의 위대한 통찰력에 깊은 경외감을 느낀다.그렇다. 플루타크의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빈부격차는 실제 건강격차를 낳는다. 울산대 의대 강영호 교수의 연구를 보면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초나 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동네에 따라 사는 이들의 수명의 차가 나타나는 것이다.가난은 질병의 원인이며 질병은 많은 이들을 가난에 빠뜨린다. 가난과 질병 그 악순환의 고리다. 기실 소득 직업 학력 등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가 건강격차를 낳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는 국내서도 수없이 많다.30-69살 남녀 8414명을 대상으로 4년 동안 사망여부를 추적해 교육수준이 고졸미만인 사람은 고졸이상인 사람보다 사망할 위험이 1.9배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2003년 중졸이하 저학력의 흡연율은 대졸이상 남자 고학력층에 비해 10-38% 높게 나타난 연구도 있다.건강행태에서도 학력과 소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질병의 발생 자체가 소득계층 간에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인 연구도 있다.제주대 의대 이상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암의 경우 남자 저소득층 20%가 상위 20%에 비해 암 발생률이 1.65배 높았다. 암 환자를 3년 동안 추적 관찰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소득구간을 5구간으로 나눴을 때 최하 소득계층이 최상 소득계층보다 유의하게 더 많이 죽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방암의 경우 2.13배였다.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려 3배나 더 많이 죽었다.이른바 우리 사회의 건강불평등 현상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일찍 죽게 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인가? 우린 언제까지 이를 그냥 두고 봐야만 하나? 이는 윤리적으로 부당하다. 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의료이용에서도 이런 불평등이 뚜렷하며 이 또한 건강불평등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일수록 병에 더 잘 걸린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더 절실히 치료가 필요하다. 의료필요가 더 많은 것이다.하지만 의료이용 총량을 살펴보면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의료서비스를 더 적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용하는 의료서비스의 질도 소득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위암 자궁경부암 유방암의 경우 가난한 이들에게서는 이를 대체로 늦게 발견한다.암의 경우 조기발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는 생명과 직결된다. 특히 위에 열거한 암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들 암은 조기에 발견해 손을 쓰면 생존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암에 대한 조기건강검진의 기회를 더 자주 더 많이 주어지게 한다면 적잖은 이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게 아닌가?2007년 대선의 해 대선주자들의 다투어 이런저런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작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의 차별이 이렇게 현저하게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를 정책으로 제시하는 대선주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고도 한국사회가 인권사회라고 할 수 있나?이런 배경에는 우선 정부의 태도와 의지부족이 적잖은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건강불평등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다. 그것도 언론과 학자들의 제기가 있자 마지못해서다.<한겨레>가 이 이슈를 제기할 무렵 복지부는 공식 보도자료까지 내어 사회문화관계장관회의에서 다루겠다며 반짝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일시적 관심과 선언적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주무부처가 이러한데 다른 부처 특히 경제부처나 정치공학에만 빠져있는 정치권은 오죽하겠는가?이런 상황에서 건강불평등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한 복지부 관리는 기획보도 당시 <한겨레> 취재진의 물음에 “건강형평성 방안에 대해 고민은 했지만 아직 형평성 측정 잣대라든지 형평성 달성을 위한 근본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건강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시각도 큰 원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건강은 개인 또는 개인이 하기에 달렸다고 본다. 이게 일반적 통념이다. 부모한테 얼마나 좋은 유전자나 체력을 타고 났나? 비록 허약체질이더라도 얼마나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했나? 얼마나 좋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나? 한 사람의 건강은 바로 이렇듯 그 당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기실 이런 개인적 관점은 건강을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보는 눈을 가로막는다. 그저 개인적이고 당연한 일을 또 궁극적으로 해결 가능하지도 않는 개인적 일을 두고 웬 호들갑이냐는 식이다.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없으니 정부 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시각에도 뚱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관점으로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문제를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개인적 관점은 왜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전체적으로 건강한지 왜 영아를 비롯한 어린이 사망은 가난한 곳에 더 많은지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건강하지 못한지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소득수준 재산 직업 인종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개인의 태생적 조건 못지않게 사람들의 건강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는 보고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상식’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으로 사회정책 또는 국가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논지 또한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건강불평등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선 의료의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 장벽을 없애야 한다. 누구나 의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적어도 돈이 없어 의료이용을 제대로 못하는 건 없애야 하지 않겠나?의료보장 체계의 획기적인 개혁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더 높여야 하며 누구나 자신의 지근거리에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최저생계비,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며 소득을 일정하게 보장해주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보편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한마디로 보편적 복지국가가 돼야 건강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참여정부 들어서는 건강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주력하기 보다 엉뚱하게 이를 악화시키는 의료산업화 논의가 더 무성했다. 보건의료의 영역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양극화의 문제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그 극심한 양상의 핵심적 증거인 건강불평등 현상에 대해선 구체적이고 실천력 있는 어떠한 의미 있는 정책도 없었다.건강불평등 문제 해결의 노력은 어쩌면 한 사회의 인권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건강은 누구나 누려야할 인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선언은 25조에서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해 자기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일찍이 “모든 이에게 건강을!”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건강불평등 문제를 정책목표로 세우기도 했다.한국사회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3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적어도 개인적 수준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건강불평등이 악화하는 상황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은 사회발전은 물론 인권적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 건강형평성학회장인 조홍준 교수 (울산대 의대)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건강불평등 더는 ‘개인’의 책임으로 두고 방기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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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8월17일 그들은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곡기를 거부했다. 유흥희(39)씨는 특히 위험했다. 폐에 물이 차 폐부종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진단은 진작에 나온 터다.하지만 단식을 여전히 풀지 않았다. 김소연(39)씨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가녀린 몸 단식으로 10kg이상 빠져 거의 뼈만 남은 모습이다. 말을 잇기도 힘들고 가슴통증은 반복되고 있다. 그녀 또한 단식을 풀지 못하겠단다. 둘 다 몸이 망가져도 성과없이는 결코 단식을 풀 수 없다는 태도다.김소연·유흥희씨는 각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조합원이다. 8월 18일로 이들의 단식은 무려 70일째에 이른다. 목숨을 내던지는 투쟁이 아닐 수 없다.안타깝게도 이런 사투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오랜 투쟁으로 지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조합원들의 안타까운 눈물과 한숨 뿐이다.지난 2005년 7월 위성라디오와 내비게이션을 생산하는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300여명의 생산직 노동자 중 계약직과 파견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290여명이었다. 이들은 당시 최저임금보다 단지 10원많은 월 64만1850원을 받았다.이 중 200여명이 마침내 노동조합의 깃발을 올렸고 그해 8월 파업을 벌였다. 순이익 210억원을 벌어들이던 회사는 그해 10월 집단해고와 직장폐쇄로 노조의 행동에 맞섰다. 이듬해 12월 법원은 회사가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썼다고 판결했다. 회사의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문 것이다.하지만 법은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울타리가 되지 못했다. 회사는 고작 벌금 500만원만 내면 그만이었다. 이어 회사는 생산라인을 완전도급으로 돌려버렸다. 회사는 이후 이제 법적 책임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090일로 이어져 온 투쟁이었다. 공장점거 농성 삭발 3보1배 고공시위 법정투쟁 다시 무기한 단식 농성 70여일…. 노동자들은 갖은 투쟁을 벌였다.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건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300여명에 가까운 조합원 중 이제 남은 이들도 많지 않다.그럼에도 이들은 결코 파국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단지 조금 나은 생활을 바랄 뿐이다.사태가 이 지경이지만 노동부는 수수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을 놓은 지 이미 오래다. 몇 달 전 필자는 이영희 노동부 장관을 다른 언론사 사회부장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다.이 자리에서 장관은 가장 취약한 노동자는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이며 그래서 노동부는 일자리 창출을 정책 중심에 놓을 것이며 이는 곧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설파했다.이에 필자는 기륭전자 사태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거론했다. 기륭전자 노동자가 얼마나 파업을 하고 있는지 장관은 아느냐는 물음에 장관은 글쎄라며 단지 오래된 것같다고 얼버무렸다.필자의 물음은 해결방안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논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장관은 이미 그것은 ‘법’으로 끝난 문제라는 답변만 되풀이해했다.법 법치를 외치는 정부. 그렇다면 우리 헌법 34조를 기억하고나 있는지. 장관에게 되물었다. 헌법 제34조를 잘 알지 않느냐고. 34조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사회보장을 국민의 기본권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라고.정치권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런 상황에 대해 거의 움직임이 없다. 문제투성이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든 이들 거대 정당들은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두고 국회 원 구성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혈세를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다만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찾고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도 외면하긴 마찬가지다.숫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언론이 더 많다. 이처럼 사회 각계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기륭전자 사태는 비상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어디 기륭전자 뿐인가. 이랜드 노동자들은 400일째 케이티엑스 여승무원들은 870여일째 코스콤 노동자들은 300일 넘게 각각 장기투쟁을 벌이고 있다.공통점은 모두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파견 용역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며 파업이나 단식 등을 유일한 힘으로 삼고 온 몸으로 절규하는 이들이란 것이다.이 땅의 비정규직은 무려 860만명이다. 법도 정부도 사회도 그 어디에도 이들을 위한 울타리는 없다. 철저한 소외와 방치 외면 속에 놓여 있는 이들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또다른 방증이다.이들의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울리는 국가 사회를 우린 복지국가 복지사회라고 할 수가 있나?기실 비정규직은 한국의 복지국가 경로와 특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송호근(서울대)·홍경준(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복지국가의 태동’에서 “한국의 복지제도의 원리 중 매우 중요한 점은 자격요건이 고용여부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이른바 고용연계성(employment-based entitlement)이다.두 교수의 진단대로 실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이뤄진 복지확대는 특히 사회보험의 발전은 이런 고용연계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고용 연금 의료보험 모두 소득이 분명한 대기업 부문에서 시작해 점차 소기업과 자영업으로 확대되었다.이에 대해 “이는 재정안정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라며 “전 국민으로 확대되는 기간에도 고용유형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구분선이 수혜자격을 결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게 두 교수의 진단이다. 기실 취업자의 50%에 이르는 비정규직은 고용주로부터 4대보험 등 각종 복지혜택에서 배제돼 있다.이런 한국적 특성은 복지국가 경로와 학문적 논쟁 등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선 학문적 수준에서조차 복지국가 논의가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다.복지국가 체계 논쟁도 에스핑 앤더슨의 틀에 기대어 제각기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 경로라고 주창하고 있지만 논쟁의 수준이나 제시하는 근거는 여전히 추상적이거나 서구의 틀에 끼워넣기하는 식에 그친다. 또는 어느 한가지면으로 부각시켜 과잉해석을 내놓거나 현실적 고려없은 주창적 선언을 하기도 한다.현실을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결방안이 없는 복지국가론은-이론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라도-우리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 현실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 바로 비정규직이다.복지의 ‘압축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와 해법없이 이뤄지는 복지국가 논의는 공허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복지동맹 등 복지정치에 대한 어떠한 탐색도 부분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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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7거대한 도전이며 전복이다. 민주주의의 도약이다. 하여 촛불행진은 또 하나의 ‘6월항쟁’이다. 지난 5월2일부터 타오른 촛불은 6월에 접어들면서 엄청난 가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거대한 해일처럼 촛불은 기존의 모든 것들을 뒤집고 무너뜨릴 태세다.역대 최고의 지지도를 업고 탄생한 정권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여야의 정치권도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듯 허세를 떨치던 조중동 등 보수언론도 촛불의 행진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 뿐이 아니다. 한때 거리를 주도했던 운동권과 노동조합도 촛불 앞에서 당황하고 무기력하긴 마찬가지다.그들은 더는 ‘지도부’가 아니다. 촛불은 지금 ‘제도화’된 모든 정치·사회세력들을 깡그리 갈아 엎으며 타오르고 있다. 2008년 봄에 피어올라 6월에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촛불의 가장 큰 새로움은 하여 ‘전복’이다.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해학으로 때로는 풍자로 시시로 옷을 갈아입는 촛불행진은 1968년 파리의 ‘6월혁명’처럼 전복의 장이면서도 동시에 ‘축제의 한마당’이기도 하다.시민은 광장과 거리에서 기성의 것들을 신나게 비웃고 재미나게 조롱한다. 엄숙함은 더는 2008년의 촛불과는 거리가 멀다. 신명과 자발성의 옷을 입은 새로운 촛불은 그래서 한마디 단어로 하나의 빛깔로 규정할 수 없다. 어디로 튈지도 알 수 없다.거대한 촛불의 물결은 지금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끝을 모른 채 들불처럼 좌충우돌하며 일고 있다. 광장에서만이 아니다. 동네 구석구석에도 촛불이 타오른다. 촛불의 전복은 날이 갈수록 다채롭고 항거는 더욱 웅숭깊다.촛불이 겨냥하는 궁극적 대상은 이명박 정권이다. 출범 100일 만에 시민들에 의해 이처럼 뿌리 채 뒤흔들린 정권은 일찍이 있었던가? 그만큼 이명박 정권의 모습은 지금 매우 위태롭고 초라하다. 이유는 뚜렷하다. 무엇보다 국민을 깔보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얕본 탓이다.그릇된 쇠고기 협상만이 아니다. 대운하 민영화란 이름의 사유화 자율화란 이름의 경쟁일변도 교육정책 등….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기는커녕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이런 독선적 정책 추진과 검찰과 경찰 등 물리력에 의존하려는 권위주의적 태도는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었다.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피로 성장한 나무다. 4.19의 핏빛 저항과 저 80년 빛고을의 주검으로 태어난 이 땅의 민주주의는 더는 독선과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 흥과 힘을 얻어 솟구치는 탄성체가 된 지도 오래다.대통령의 어설픈 대국민 사과 담화문으로 얄팍한 끝장토론으로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금 짓밟은 이른바 ‘자율규제’란 기만책으로 더구나 ‘강부자·고소영 내각’의 ‘인적쇄신’으로도 그 어느 것으로도 촛불을 잠재우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인식으로 촛불을 끄려하는 권력자들의 무지에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기만적이고 임시방편의 책략은 오히려 촛불의 크기만 키울 뿐이란 사실을 이 정권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이 나라 10대인 ‘2.0세대’가 피어 올려 이제 남녀노소 모두의 것이 된 ‘2008년 6월의 촛불’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치세력도 그 어떤 사회집단도 그 행진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새 세상 더 좋은 사회 새로운 복지국가 등을 꿈꾸는 이들이 촛불행진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또 2008년 6월의 촛불에는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움이 분출한다. 광장이 다시 시민들의 품 안으로 되돌아왔다. 광장은 더는 의례적 의식의 공간이 아니다. 광장은 거리에만 있지 않다.네티즌들은 꾸린 광장은 기존의 광장과 달리 더 뜨겁고 더 맹렬하다. 미디어 언론은 더는 전문 언론인들의 것이 아니다. 시민 하나하나 각자가 언론의 소비자이면서 주체다. 그들은 엄지로 휴대전화를 이용해 뉴스를 만든다. 자신의 노트북으로 현장에서 실시간 방송 중계도 한다.이들이 만든 뉴스들은 포털 카페 블로그 등에 올려지고 여기저기로 확산된다. 주류 방송마저 압도하고 있다. 1인 미디어의 시대이자 현란할 정도로 눈부신 디지털 저널리즘 스트리트 저널리즘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새로운 발견은 또 있다. 한 달 이상이나 이어지는 비폭력 평화시위 정치와 운동의 뒷전에서 구경꾼이나 도우미로 머물렀던 여성들이 전위에서 서서 집회 현장을 이끄는 모습 6월항쟁 이후 신자유주의 거센 물결 속에 깃든 욕망의 정치를 일거에 분쇄하듯 무너뜨리는 탈물질적 가치 투쟁의 열기 그 연대와 공동체의 경험….전근대적 세계관에 젖어있는 이명박 정권이 어찌 이 탈근대적인 촛불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정권과 시민의 간극은 너무나 멀다. 간극은 기존의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다.정권도 운동권도 그 어느 집단도 들끓는 유월의 촛불을 잇대는 줄을 갖고 있지 않다. 아무 곳도 없다.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이 유월의 촛불을 담을 그릇이 실상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불행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움이자 가능성이다. 이것이 무정형이며 무정부적인 유월의 촛불 광장에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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