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
" 사회권"으로 검색하여,
5 건의 기사가 검색 되었습니다.
-
2024-06-28▲ 이재섭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이 21대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중단되었다. 지난 5월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연금개혁을 22대 국회로 넘기겠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여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21대 국회 회기 내 연금개혁 논의 중단을 선언했다.주요 개혁 의제인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에 대하여, 시민대표들이 선택한 50%보다 한참 낮은 44% 안을 여당이 제시하였고, 여당 안을 야당이 최종 수용했음에도, 여당은 갑자기 말을 바꿔 합의를 무산시켰다. 연금개혁 논의를 관장하던 연금개혁특별위원회(이하 ‘연금특위’)는 가시적 성과 없이 해체되었다. ◇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개혁구도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 직속에 설치하겠다던 대선공약을 아무렇지 않게 파기했다. 스스로 1호 국정개혁과제라고 이름붙인 ‘연금개혁’에 대한 책임을 국회에 떠넘겨 버렸다.국회에 급조하여 설치한 ‘연금특위’는 윤석열 대통령이 공언한 ‘공·사 연금 전체를 망라하는 완성판 연금개혁’을 책임지고 성사시킬 수 있는 기구가 될 수 없다.더구나 정부는 물론 여·야 정당들도 하나같이 자신들의 개혁대안과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은 채 개혁논의에 수동적으로만 참여하였다. 정부도 책임에서 빠졌는데 여·야를 불문하고 책임을 자처할 필요가 있겠는가?국민연금의 보험료율 하나를 인상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 지난 수십 년 간의 연금개혁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하물며, 윤석열 정부는 다섯 개의 공적연금은 물론, 퇴직연금과 주택(농지)연금,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들까지 포괄하는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그만큼, 정부와 사회의 역량을 장기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다.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집중하여 추진하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어려운 개혁임에도 개혁의 어떤 그림도 없이 국회에 넘겨버린 것이다. 이런 정부의 행태에 여당, 야당, 시민단체, 언론들 모두 침묵하였다. 특히 여당과 야당은 무슨 권한이나 얻은 것처럼 어떤 이의제기도 없이 ‘연금특위’에 참여했다. 공적연금개혁의 중차대함에 대한 이해나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태도로 볼 수밖에 없다.방대한 범위의 개혁을 변변한 지원조직이나 정교한 로드맵도 없이 ‘연금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에 의존하는 개혁논의가 제대로 진척될 수 없었다.예상대로 개혁 논의의 우선순위를 놓고 혼선을 거듭하였고, 논의의 범위도 제대로 확정하지 못한 채 개혁논의가 공전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2024년에 들어 연금특위는 서둘러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여 방대한 개혁과제들에 대한 방향을 시민들에게 묻는 절차를 거쳐 봉합하는 수순에 들어갔다.‘연금특위’가 최소한도로 줄여 정리한 7가지 개혁 주제들에 대해 이해집단들의 의견을 수렴 했고, 이와 함께 500인의 시민대표단을 선정하여 숙의토론과 투표를 거치면서 주제별 개혁대안 선호의 변화를 파악하였다.4월에 최종 투표가 있었고 그 결과, 정치적으로 예민한 ‘소득대체율’에 대해 여·야간 합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용산의 개입으로 논의가 중단 된 것이다. ◇ 윤석열 정부 연금개혁의 숨은 목적지...공적연금 축소, 사적연금시장 확대? 21대 국회에서 연금특위를 통해 진행된 연금개혁은 외형상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내실 있게 진행된 모습을 보였다. 입장이 다른 전문가들을 통한 사실자료 설명회와 개혁방향에 대한 사회적 학습, 이해집단 대표들의 문서화된 의견개진, 시민대표들의 숙의토론과 3차에 걸친 표결이라는 공론화 절차 이행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하지만 애초에 잘 못 끼워진 단추인, 개혁구도 중간에 이런 절차를 거친다는 것만으로 중차대하고 방대한 개혁과제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연금개혁의 책임 주체, 지원 조직, 개혁 로드맵, 진행 일정, 논의내용 등 모든 면에서 윤 대통령이 공약한 완성판 연금개혁을 달성할 수 있는 개혁구도는 처음부터 아니었다.나아가, 이번에 비상식적으로 중단된 연금개혁 사태를 보면서, 윤석열 정부가 애초에 의도적으로 국회에 바지 사장을 앉혀놓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혁 상황을 조정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그 보이지 않는 손이 의도하는 개혁 방향은 공적연금의 강화나 내실화를 통한 ‘빈곤예방’과 ‘적절한 노후소득보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득대체율’조정에 대해 여·야 간 최종 합의를 중단시킨 것이 그 증거이다.더 나아가, 공적연금 축소와 사적연금확대로 자본시장 파이를 키우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비효율적인 개혁구도 설정이 초래하고 있는 위험을 야당이나 시민단체, 언론, 학자 누구도 날카롭게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역시 이 개혁구도의 문제를 신문 칼럼을 통해 몇 차례 제기하는 소극적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이미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언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한 거대 야당조차도 아무 문제제기 없이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 덜컥 참여하였다. ‘연금개혁의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야 모두 실세 사장의 들러리 역할을 해 온 모양새다. 국회의 ‘연금특위’ 호는 마치 조난당한 배처럼 방향키를 누가 잡을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시종 허둥거리다가 실세 사장의 한 마디에 난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국회회기에서의 여·야 합의 불발이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시민대표단 다수가 선택한 소득보장 강화(소득대체율 50%로 상향조정)와 재정안정화(보험료율 13%까지 인상) 병행 안이 여·야의 손에서 크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만약 정부·여당이 고집한 안인 소득대체율 44%, 보험료율 13%로 야당이 합의했다면, 그리고 다음 국회에서 여당의 급여삭감을 의도한 (변칙)구조개혁안을 기초로 다시 개혁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야당은 세 가지 점에서 크게 명분과 실리를 잃었을 것이다.첫째,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힘으로 어렵게 찾아낸 노후소득보장 강화의 명분과 기대를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둘째, “시민대표들의 숙의토론을 통한 사회적 학습과 이에 따른 대표성의 행사를 일거에 무산 시킬 권리를 누가 여·야에게 주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셋째, 개별적 연금개혁으로는 치유가 어려울 정도로 피폐해진 공적연금 체계 전반을 재구조화하여 공정하고, 평등하며, 효율적인 다층연금체계를 구축할 기회를 잃게 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 합의가 안 된 것이 다행일수도...개혁구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이제 문제는 22대 국회에서 연금개혁 구도를 어떻게 다시 구축할 것인가이다. 이는 국민들의 노후의 삶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안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마음껏 도전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와도 깊은 상관성이 있다.보험료와 급여주준에 대한 것은 비록 합의가 쉽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개혁 논제일 뿐이다. 그 외에도, 더 중대하고 다양한 개혁과제들이 지금 묻히고 있다. 예를 들어 정체성과 기능을 상실한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소득의 역 분배 실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국민연금, 시너지가 아닌 서로 발목 잡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에 대한 대책, 민·관 연금제도 구조 상이에 따른 끝없는 갈등과 형평성 시비, 장기적으로 해소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국민연금 가입기간 등이다.모수개혁이나 (변칙적) 구조개혁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정공법으로만 올바른 길을 열수 있다. 그러기 위해 야당은 가장 먼저 정부·여당의 의도에 휩쓸리지 않고 합리적이고 민주적 개혁논의 구도를 만드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다음으로는, 연금개혁의 철학과 비전, 개혁 방향과 전략 등 연금체계개혁(pension systems reform)이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여, 국민들에게 꿈을 주고 논의와 선택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근로자와 고용주와 국가의 3자 모두에게 재원부담의 짐을 기꺼이 지도록 설득할 수 있다.지금까지 우리나라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연금개혁의 비전을 당원들과 국민들에게 명확히 제시하고 각 근로자, 고용주, 국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려 노력한 정당을 본적이 없다.그런 면에서 정책 쇄빙선 역할을 자임하는 ‘조국혁신당’은 먼저, “왜 국민연금개혁이 아닌 연금개혁인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노후의 삶에 대한 비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개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공적연금 축소를 위한 위장된 구조개혁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진정한 구조개혁이요 근본개혁인 ‘연금체계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권보장 정당으로서의 정책쇄빙선의 역할이다. ◇ 극심한 노후빈곤과 오작동하는 연금체계, 연금학자와 전문가들의 책임이 크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연금개혁, 특히 국민연금개혁은 국민들 편에서 보면 지나치기를 넘어 가혹하기까지 했다. 공무원 등 특수직역 공직자들을 위한 공적연금제도와는 다르게 대다수 민간 국민들이 가입한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차별적이고, 선제적이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급격한 삭감개혁으로 일관했다.그 결과가 지금의 가혹한 노인빈곤과 노인자살의 현실이다. 비록 주어진 책무의 수행이라고는 하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동안 국민연금 삭감 개혁에 앞장선 관료와 학자들 대부분 공무원연금이나 사립학교교직원연금에 가입되어 있다.그들은 월 400만원 가까운 연금이 보장된 분들이다. 부부합산 월 7~800만원도 받을 수 있다. 평균 연금액 59만원인 국민연금 수급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입된 공적연금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거나 묵인해 왔다. 그럴 수도 있다.그러나 뒤 늦게 태동하여 채 발육도 되지 않은 국민연금에 대해 왜곡된 ‘기금고갈론’과 ‘세대갈등론’으로 삭감개혁을 강요해온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연금상품이 아닌 공적연금은 왜 우리에게 필요하며, 보험수리 전문가가 아닌 연금전문가, 사회정책학자는 왜 필요한가? 삭감 개혁에 따른 국민들의 빈한한 노후의 삶도 문제지만, 가뜩이나 떨어진 국민연금에 대한 가입자들의 신뢰를 더 추락하게 만든 것은 더 큰 문제다.이는 결국 청년들의 연금가입 회피로 이어져 연금빈곤의 악순환을 야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제도의 장기적 유지가능성은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극심한 노후빈곤과 노인자살의 참상이 개선되지 못하는 데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연금학자나 전문가들의 책임이 크다.정치권과 언론들은 때로는 의도를 가지고 때로는 잘 알지 못하여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의 원리를 혼동시키고 재정문제를 과장하여 부각시킨다. 또한 국가의 공적연금에 대한 재정책임을 부정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국가는 자신의 역할의 많은 부분을 공적연금에 전가하여 수행하게 하고 있다. 즉 공적연금을 통해 강제적으로 소득을 재분배시켜 빈곤을 예방하게 하고 사회적 연대 기능을 강화시킨다.또한 출산과 군복무 등 사회공헌에 대하여 연금제도가 보상하게 만든다.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공적연금에게 부가시켰다면 마땅히 연금재정에 대한 책임도 져야한다.시혜가 아니라 의무다. 공적연금의 독특한 사회적 연대원리와, 과도기 가입자들에 대한 배려와, 국가의 재정책임원리에 대하여 연금학자와 전문가들은 정치인, 관료, 언론들을 교육하고 설득하고 주장해야 한다. 나아가 연금정치의 구도를 간파하고 정책수단을 목적으로 도치시키려는 집단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개혁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 역시 연금학자들의 몫이다. 초기에 형성된 연금개혁 구도는 개혁의 방향과 내용과 속도를 실질적으로 제약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개혁구도에 대한 문제나 대안제시 없이 정부·여당이 제시한 대로 논의에 순응만 한다면 이는 연금개혁의 결과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학자로서의 무책임한 태도일 뿐이다. ◇ 22대 국회에서의 연금개혁 구도와 논의의 전개 방향은? 그렇다면 앞으로 진행될 연금개혁은 어떻게 될까? 22대 국회에서 연금개혁 절차가 다시 재개된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이 원하는 바가 달성될 때까지 연금개혁이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울 것이다.따라서 아무리 합리적 절차를 통해 타당한 개혁 방안이 도출된다 하더라도 용산의 의도가 달성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지금처럼 외면되거나 거부당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에서 야당이 발의하여 통과시킨 모든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행태를 보아 반드시 그럴 것이다.드러내 놓지는 않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인 실세 사장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적연금 영역을 축소하고 사적연금 시장을 키우고 연금기금 관리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그간의 시행령 개정으로 추진한 여러 조치들과 정책기조 발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또 예견되는 일이다. 이것이 윤석열 정부의 완성판 연금개혁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가 한다.이를 충분히 가만하고 연금개혁에 임해야 할 것이다. 21대 국회의 연금개혁이 비록 중단되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결실들이 있었다. 첫째, 시민들의 집단지성은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특별위원회’의 사회적 대타협과, 이번 21대 국회의 ‘연금특위’에서 주도한 ‘사회적공론화’는 사회적 과제를 집단지성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매우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무엇보다도 연금개혁 같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과제도 정확한 논의 주제가 주어지고 사실 자료와 이에 대한 여러 관점의 전문가들 설명과 질의응답과 토론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각각의 주제에 대한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정하게 주요 이해집단의 대표를 뽑고, 주제별로 정제된 의견을 문서화하여 잘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시민대표단의 선출을 어떻게 공정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이해집단 대표 구성이나 주제 별 논의 선택지 구성에 있어서 불공정 시비 소지가 있는 일들이 있었다.예를 들어 노인 단체들에게 이해단체 정책의견서를 받지 않은 것과, 문재인 정부 사회적대타협에서 권고문에 만장일치로 들어간 기초연금 지급대상 확대를 선택지에서 제외시킨 것 등이다. 셋째, 그간의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주장하던 내용들이 프로파간다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것들이 ‘기금고갈론’에 기반한 경고의 허상이다.또한 국민연금의 실질적 보장성이 매우 취약하여 더욱 보장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다수가 공감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연금제도가 후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폰지 사기라는 세대갈등 조장도 당사자들이 비토 했다는 사실도 매우 의미가 깊다. 어려운 연금개혁의 여정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각 정당들은 먼저 각자의 연금개혁 비전을 명확히 밝히고 개혁의 방향과 목표, 개혁안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연금개혁의 실제 상황을 가정하여 로드맵과 단계별 협상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더욱 정교하게 짜서 주제별 이해집단의 의견수렴, 시민대표들의 숙의토론과 표결, 그 결과에 대한 국민보고회까지 하도록 하면 좋겠다.이를 통해 구조개혁을 넘어 역사적으로 모범적인 ‘연금체제개혁’을 한 나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공정하고 평등하며 효율적인 다층 연금체계를 구축하여, 노인이 존중받고 노후가 행복한 사회, 그래서 젊은이들 안심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도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재섭 공동대표는 사회정책학 박사(영국 University of Kent, 논문주제; 공적연금개혁의 정치)이며, 사단법인 복지국사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겸 연금개혁특별대책위원장, 공적연금수급자유니온 공동대표, 전,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전,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연구소장 등을 엮임했다.
-
시각장애인만이 안마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의료법 61조 조항이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아니면 위헌 판정을 받을 지가 장애계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이에 지난 7월 2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대한안마사협회를 비롯해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30여 단체 회원 1천 500여명이 모여 시각장애인 생존권 보장을 위한 합헌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그 동안 시각장애인들은 안마를 통해 가족을 부양했고 자녀를 교육시켰으며 사회의 일원으로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의료법 61조 조항은 사회 구조상 소수자인 시각장애인을 보호하고 진정한 인간 평등의 가치 실현을 위한 나름의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우리나라 헌법재판관들은 생존권과 같은 사회권은 국가재정이 뒷받침되어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자유권에 비해서 생존권 보장과 같은 사회권 보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판결에서 헌재 재판관들이 자유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이라는 사회권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2006년의 판결은 헌법적인 관점에서 얘기한다면 비시각장애인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에 우선순위를 둬서 합헌적인 제한이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제한이냐 아니면 과잉 제한이냐 이걸 두고 논의한 뒤 결국 과잉 제한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당시 판결문에도 나오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안마업을 주는 것은 비시각장애인들의 안마업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고 헌법재판소는 판결했다.그러면서 숫자 논리를 내세웠는데 전국에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6천 명 있는데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비시각장애인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그 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한강에 투신을 하면서까지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안마업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얼마나 절박하고 소중한 직업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시각장애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판결은 다음 3가지의 문제점이 있다.첫째, 시각장애인의 절박한 생존권인 사회권이 비시각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명시한 자유권보다 우선한다고 봐야 하는 게 세계적인 판례 추세이다.시각장애인들의 안마사라는 직업 보장을 통한 절박한 생존권의 보장이냐 아니면 비시각장애인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 보장이냐 이 두 기본권의 충돌이다.당연히 필자는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이 헌법 34조 5항에 근거하고 있고 헌법이 부여한 권리이기 때문에 두 헌법상의 기본권을 놓고 봤을 때 시각장애인들의 안마업을 통한 생계유지가 훨씬 더 절박하고 처절하며 중요한 권리라고 판단한다.둘째, 2006년 판결 때는 헌법상 명시된 권리가 무시되었다고 생각한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이 헌법 34조 5항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위헌 결정문 속에도 관련 내용이 없다. 이는 비시각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만 보고 시각장애인들의 생존권은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에 눈 감은 판결인 것이다.셋째, 장애인 같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국가가 유보직종을 법률로 지정해준 뒤 나중에 위헌 판결을 내려서 유보직종을 박탈한 판결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우리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다른 외국도 하지 않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유보직종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다수 집단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안마업이 아니면 이 땅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시각장애인이야말로 원천적으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봉쇄당한 소수자들이다.안마업이 없다면 생계유지조차 불가능한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는 그 자체로 생존이요 생명이다. 이번 판결에서 진정한 법 정신의 승리 정의가 실현되길 바란다.
-
총선이 끝났다. 대선이 끝난 뒤 100여일 만에 치루어진 총선이라 결과는 사실상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 프레임이 여전히 총선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 심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보수세력의 승리가 예견되었고 지역구도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여권 내부의 권력다툼 호남을 기반으로 한 야당세력의 권력다툼이 있었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단지 중요한 사실은 보수세력의 국회 권력 장악이며 그것도 200석이 넘는 보수세력의 탄생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제1야당이 된 통합민주당 역시 보수적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번에 당선된 통합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보더라도 그렇다.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필자의 심정은 그저 담담하다. 이미 대선 전부터 예견된 결과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예상된 결과가 확인되기까지 지루하고 길었던 시간이 끝나 차라리 홀가분하기도 하다. 이제 총선을 통한 정치세력의 재편은 끝났고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할 시기다.◇ 이번 총선의 결과와 진보정당의 움직임이번 총선 결과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었다. 그저 예상된 결과를 확인하는 다소 심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에서 우리는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를 향한 큰 흐름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 몇 가지 짚어보아야 할 점을 찾아야 한다.우선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결과와 동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분열되어 각각 총선에 임했다. 과거 진보정당을 지지하던 표들이 분열되어 표현된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예전에 민주노동당이나 한국사회당을 지지했던 표들 중 일부는 창조한국당으로 옮겨가기도 했다.이러한 분열은 결국 지난 17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진출시켰던 성적에 비하자면 반토막인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단지 ‘분열’로 인해 총선 결과가 나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평가가 끝나서는 안된다.무엇보다도 진보정당의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재선을 하기도 했고 수도권에서 40% 이상의 득표를 하면서 선전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보편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하지만 지난 17대 국회 4년을 되돌아본다면 4년 전 총선에서 민노당이 거둔 성적은 준비된 실력에 비해 거품이 포함된 것이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이번 총선 결과는 민노당에 걸었던 국민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표현된 것이다. 창조한국당이 이런 분위기에서 진보정당에서 이탈한 표를 흡수한 것이다.진보신당이나 민노당 모두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대선 이후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화두가 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치세력이 과거에 비해 넓고 다양한 진보의 가치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생태·평화·복지 등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진보의 가치를 발견하고 여기에 진보의 중심을 옮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이 가운데 진보정당운동의 복지국가 또는 복지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발견된다. 한국사회당에서는 ‘사회적 공화주의’를 내세우며 진정한 사회권이 보장되는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에서도 ‘사회국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복지사회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과 진보적 가치를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났으니 이제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다행히도 살아남은 진보신당 그리고 해체 후 다시 재건을 모색하는 사회당 등 여러 진보정치세력들이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위해 진지한 고민과 모색의 시기에 들어가게 된다.이들에게 그 동안 복지국가의 전망을 내걸고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을 고민하고 내용을 축적 확산해오고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량 지원과 참여적 교류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곱씹어 봐야할 고민 - ‘88만원 세대’의 보수화이번 총선 결과에서 참으로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이야기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통칭되는 20대들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 소식을 듣고 있으면 소화가 되지 않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이다.그들을 뭐라 탓하기엔 그 몹쓸 놈(?)의 책임감이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우석훈 박사는 지금 20대들에 대하여 희망을 찾기 어렵고 신자유주의적 피해가 가장 집중되어 역사적으로 무시되고 착취당하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그는 희망은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희망을 만들기엔 역량이 부친다는 점이다. 구조적으로 ‘88만원 세대’로 만들어진(!)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한국 사회의 현재 구조를 깨고 나와 희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어야 할 필요와 계획이 무엇일까? 오랫동안 곱씹으며 고민해야 할 과제일 듯하다.◇ 개발주의 공약을 넘어서기 위한 준비를 하자이번 총선은 쟁점과 의제가 거의 없었다. 농담 삼아 ‘공천’이 최대 쟁점이었다고 할 정도다. 누가 공천되었고 안되었으며 안된 자들은 탈당하여 출마하며 표를 구걸했다.심지어 이 과정에서 “난 누구와 친하다”는 식의 전대미문의 당이 출현했으며 무려 14명의 당선자를 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한반도 대운하’와 영화 식코(Sicko)가 계기가 되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정도가 거론되었으나 한나라당이 김빼기식 무대응으로 일관해 의미 있게 다루어지지 못했다.그런데 지역구 선거 현장에서는 공약 경쟁이 더러 있었다. 하나는 지역개발 공약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교육문제였다. 진보정당 후보를 제외하고는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모든 후보들이 지역개발 특히 ‘뉴타운’ 공약을 내걸었으며 특목고 유치를 약속했다.이 두 가지 공약은 당선을 위해(!) 무조건 후보들이 내걸어야만 했다. 일부 진보 후보들을 제외한 여야 모든 후보들이 최근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그릇된 욕망과 이기심의 투표 행태’에 굴복한 것이다.서울에서 54년 만에 진보정당 후보가 당선되는 기록을 만들 뻔했던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가 한나라당 정치신인에게 밀려 패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노회찬 후보는 ‘뉴타운’이라는 이름의 지역개발 공약과 특목고 유치를 내걸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전 여론조사에서 13전 13승을 기록했던 노회찬 후보가 패배했던 주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노회찬 후보는 선거운동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개발이 곧 경제성장’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이 우리 삶의 수준과 질을 좋게 할 것이라는 ‘개발주의’의 보편화 현상이 더욱 강해졌다는 점이다.‘뉴타운 건설’이라는 대표적 개발공약이 ‘개발 = 삶의 질 개선’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퍼뜨린 것이다. 이 기괴한 논리의 배후에는 자산 가치의 증대를 통한 불로소득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이런 상황에서 ‘복지’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하냐 취약계층에 집중적인 선별적 복지를 해야 하냐는 거론될 여지가 없었다. ‘복지 vs 반복지’의 선거 프레임이 만들어질 여지는 거의 없었다.이것은 단지 이런 주장을 할만한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주장을 앞장세울 정당‘이 없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발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이것이 중심적인 선거 프레임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따라서 이런 ‘개발주의 프레임’을 넘는 게 우리의 숙명적 과제이다. 이것을 넘지 못한다면 ‘복지국가 담론’이 국민적 담론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토건주의 토건국가’를 반대하고 생태를 유지?복원하며 토건에 지출될 비용을 ‘보편적 복지’에 사용하는 생태-복지의 연대운동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이런 고민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복지국가의 담론과 전망을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이를 현실화시켜 머지않은 장래에 역동적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들어내겠다면 더욱 그렇다.이번 총선 결과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뿐만 아니라 복지국가를 염원하는 우리사회의 지식인 활동가 일반 국민을 포함하는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을 포함한 복지국가 정치세력에게도 더 많은 숙제를 내고 있는 것이다.
-
2021-08-25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자연권’ 사상이 국가로부터 공인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이다.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비로소 국가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는 이론적 기반이 확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정부 권력은 국민이 동의하는 범위에서 발생하고 국민과 합의 없이는 세금을 징수하거나 군대를 조직할 수 없고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제도를 만들 수도 없게 된 것이다. 헌법상 ‘자유권적 기본권’과 이를 위한 리더십 시민혁명 당시, 생명권·자유권과 같은 자연권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절대 권력에 의해 생명과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고 신분제에 의해 차별 당했던 당대 사람들의 경험은 국가 이전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불가침의 권리를 국가에게 요구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연권은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를 ‘자유권적 기본권’이라고 부른다. 국민들은 스스로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고, 자유롭게 거래를 하며(계약자유의 원칙), 내 노력의 결과 얻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소유권 절대의 원칙). 이러한 자유는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을 전제로 한다.이러한 이유로 근대 입헌주의 헌법상의 기본권은 곧 ‘자유권적 기본권’을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자유권적 기본권은 그 본질상 국가 권력의 절제를 요구한다. 국가는 국민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 권력은 국민이 동의한 범위에서 존재하고 작동하게 되므로 국가의 절제는 그 동의의 내용과 방식에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국민의 동의는 법률의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법치주의 원리가 등장하게 되는데, 특히 국가의 절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법의 다른 해석 여지를 최소화하게 되며, 이는 ‘형식적 법치주의’와 연결된다. 이와 같이 자유권적 기본권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국민을 간섭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지고 존재해야 한다. 이와 연결되는 국가의 개념이 이른바 ‘야경국가’이다. ‘야경국가(夜警國家)’는 말 그대로 밤에 순찰이나 해주는 정도의 기능을 가진 국가를 말한다. 개인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가의 기능은 치안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국가관이다. ‘소정부주의(Minarchism)’라고도 한다. 즉, 최소한의 기능만 가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국가관을 말한다.야경국가는 자유권적 기본권 중심의 헌법 하에서 국가의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국가관이다. 국가는 국민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간섭하지 않고 국가의 작용을 최대한 절제하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 국가의 작용은 국민이 사전에 동의해서 마련한 매뉴얼, 즉 법률에 따라야 한다. 그 매뉴얼(법률)에 대한 다른 해석도 절제되어야 하므로 법률의 문언을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는 ‘형식적 법치주의’가 강조된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국가 지도자의 권한도 매뉴얼대로 운영되는 국가 시스템을 관리하는 범위에 한정되며, 매뉴얼을 벗어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판단은 억제된다. 지도자는 관리자로서의 덕목을 갖추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매뉴얼에 따르는 것 이상의 능동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정 작용에 대한 사법 심사는 매뉴얼에 충실 했는지의 여부에 한정된다. ‘사회권적 기본권’의 등장과 국가의 역할 확대근대 이전의 신분제 사회와 비교했을 때, 자유권적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는 당대 사람들에게 신세계와 같았을 것이다.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한 지위에서 자유롭게 거래하고 경쟁하며, 그렇게 획득한 재화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간의 본성과 환경적 요인 등이 결합한 근대의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아니었으며, 국가의 억압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타인에 의해 또는 개인적 사정에 따라 자유가 제한되기도 하였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주어지는 기회도 달랐으며, 우연한 사정에 따라 삶의 기반이 좋아지거나 무너지기도 했다. 재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계속 부를 축적하는 반면, 근로를 해야만 겨우 생계가 유지되는 사람에게 사유재산 제도는 무의미한 권리가 되고 말았다. 즉,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방임하는 자유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원시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는 이념 대립에 이어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결국, 국가가 국민을 방임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반성이 대두되었다.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는 헌법상 ‘기본권의 진화’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른바 ‘사회권적 기본권’의 등장이다. 국민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헌법 제10조). 행복하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권을 보장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프면 치료를 받아 건강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건강권), 쾌적하고 안전한 주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며(환경권, 주거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노동권),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문화권) 행복한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도 수정이 필요하였다. 나이나 성별, 개인의 능력과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들을 조건 없는 무한경쟁으로 내몰게 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부여하되 상대적 약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나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할 때라야 사회 전체의 행복추구권이 보장되는 것이다. 더불어, 스스로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받는 것은 개인의 수요와 선택이 아닌 국가가 국민 모두에게 보장하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자유권적 기본권’이 자유를 보장받는 권리라고 한다면, ‘사회권적 기본권’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자유권적 기본권이 ‘인간’의 권리라고 한다면, 사회권적 기본권은 ‘국민’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권적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는 국가의 기능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국가는 더 이상 국민을 방임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국민의 천부인권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절제의 미덕에만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법률이라는 매뉴얼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법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민의 윤택한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법을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실질적 법치주의’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를 극복하고 현대의 문을 열었으며, 야경국가에서 복지국가로 국가관의 전향이 이루어졌다. 자유권적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입헌주의 헌법은 극복되었고, 사회권적 기본권이 추가된 현대 복지국가 헌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현대 복지국가는 필연적으로 그 역할에 따른 ‘큰 정부’를 전제로 한다. 국가의 기능이 야간 순찰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삶 전반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현대 복지국가에 요구되는 지도자의 리더십현대 복지국가의 지도자 리더쉽은 근대 입헌국가의 그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매뉴얼을 관리하는 수동적 리더십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하게 자원을 투입함으로써 위험을 관리하는 고도의 정무 능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행정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공적 자원을 배분하고 지원하는 종합적 판단 능력과 고도의 추진력이 중요해졌다. 매뉴얼은 최소한의 질서를 규율할 뿐이며,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모든 경우를 예정하고 있지 않다. 그 공백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 필요한 정책 결정과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업무에 따라 분산된 권한과 자원을 조율하여 구체적 사안에 어떻게 투입할 것인지, 그 경우에 파생되는 행정적 문제와 책임 소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복지국가 지도자의 중요한 임무가 된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발생한 유조선 충돌 사고로 약 7만9천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었다. 이 사고로 기름띠가 인근 해안으로 확대되었고, 어민들의 삶에 중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해양경찰청장의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분노를 표출했다. 해양경찰청장은 소형 선박이 많이 필요한데, 보험사의 비용 문제로 힘들다거나 날씨가 좋지 않다는 등의 현실적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때 노 대통령은 기름띠 확산의 방지라는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했었다. 비용과 책임 문제를 이유로 방재에 소극적이지 말라는 뜻이었고, 이로 인한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매우 안타깝다. 재난의 크기는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대통령의 언급은 코로나19 재난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재난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도 엄연히 존재한다. 반면에 생업 자체를 상실한 사람들도 많다. 안정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업장이 폐쇄된 자영업자도 많다. 그러므로 재난지원금 지급 사안은 결코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와 국민의 필요를 살피고, 여기에 상응하는 지원을 하는 것은 현대 복지국가의 헌법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런데 똑같은 금액을 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뿌리자는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우리 헌법의 원리를 감안할 때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이 헌법상의 가치보다 일부 정치인들의 편협한 이해관계에 따른 기형적 발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로 선별비용을 운운하는 것은 현대 복지국가의 원리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그런 비용을 들이더라도 헌법상의 의무를 부담하면서 국민 전체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산화 수준의 향상과 행정 능력의 발달로 인해 선별비용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리하자면, 능력이 있고 풍족한 사람에게는 자유를 보장하되 그렇지 않은 영역들을 계속 살피고 확인해서 국가의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부는 정치권의 힘에 밀려 국민 하위 88% 지급을 합의했는데, 그것마저 이재명 경기도지사로 인해 왜곡될 처지에 놓여있다. 이 지사는 경기도의 소득 상위 12%에게도 경기도 재정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국가의 자원을 지원의 필요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투입·배분하는 것은 현대 복지국가의 헌법이 지향하는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하겠다. 화재 당시 떡볶이 먹방 출연과 지도자의 리더십‘소방기본법’상 화재방재 업무의 최고 책임자인 이재명 지사가 최근 화재 당시에 관할지역을 벗어난 자리(특히, 떡볶이 먹방 출연)에 있었다는 비판을 받자 해당 행정청은 매뉴얼대로 업무를 처리했다는 취지의 해명을 한 사실이 있었다. 앞서 언급 했지만, 근대 야경국가에 대한 반성으로 열게 된 현대 복지국가 체제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은 매뉴얼에 따랐다는 것으로 합리화 되지 않는다. 화재 진압이 단순히 ‘불을 끄는’ 행위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뉴얼을 초과해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요소들을 능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행정적 지원을 하거나 민간과 소통을 강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군대 등 다른 자원의 투입 요청을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함으로써 실무자들이 아무 걱정 없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투입하고 방재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최고 책임자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현대 복지국가에서 국민의 ‘필요’에 상응하는 보장(사회권, 적극적 자유)은 자유권적 기본권의 소극적 자유 보장과 다르다. 사회권 보장은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이 단숨에 정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을 현장에서 살피고 매뉴얼이나 기존 인력 및 제도로 해결되지 않는 공백에 집중하려는 적극적·능동적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경기도의 해명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복지국가 헌법 하에서 국가와 지도자의 존재감은 커져갈 수밖에 없다. 장차, 사회의 변화는 급격해지고 기술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등 공간적·학문적 경계가 희석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예정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과 사회적 위험도 나타날 것이고, 기존의 상식과 질서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다양한 갈등과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각지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는 계층,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공백 등을 제대로 살피고 해결할 수 있는 고도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단순히 매뉴얼에 따른 자유방임 또는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정책으로 포장된 포퓰리즘은 구시대적 리더십에 다름 아니다. 사회·경제적 사각지대를 살피고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리더십, 즉 현대 복지국가에 부합하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우리는 최근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정치적 행보를 통해 리더십의 차이를 보게 된다. 그런데 더 치열한 토론과 검증의 과정을 통해 각 후보들의 리더십 실체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장차, 사회권적 기본권도 진화와 발전을 거듭할 것이며, 이에 따라 현대 복지국가의 원리도 더욱 고도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권자인 국민은 대선 과정을 통해 복지국가의 미래 지향적 발전에 기여할 ‘준비된 리더십’을 가진 후보를 ‘매의 눈’으로 선별해야 하고, 경선·선거를 관리하는 정당·정부와 각 후보 측은 여기에 부합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김성훈 변호사는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였다. 벤처기업 운영 및 조선 기자재 제조업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해(사법연수원 38기) 대한변협 인권위원(의료 및 외국인 인권 소위)으로 인권보고서 집필에 참여하였고, 416온마음센터 법률고문, 안산정신보건심판위원, 안산시의사회 법제이사, 성남의료원 인사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안산>의 대표변호사로 활동 중이다.김성훈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변호사) webmaster@parangse.org
-
2021-06-16우리 헌법은 제11조 제1항 본문에서 "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며, 국민이 가지는 기본적 권리로서 ‘평등권’을 명시하고 있다. 평등권은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권리, 즉 ‘천부인권’에 속한다. 국가가 이것을 제도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재차 확인하고, 국가의 운영과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서 이를 기본 방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