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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2▲ 주요섭 생명운동가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나 ‘정치전환’정치, 혹은 ‘체제전환’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정권교체정치에게 진리는 현 정권의 퇴출이다.그러나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논외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전환정치는 정권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두 개의 거대정당 외에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다. 정치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구축된 민주화세대와 비-민주화세대의 세대 구도, 영남과 호남의 지역 구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 구도에 의한 정치질서의 고착을 혁파해야 한다고 믿는다.체제전환정치 역시 정치전환을 이야기하지만, 완전히 결이 다르다. 이는 급진적 진보정치의 논리로써 기후급변과 극단화된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자본주의로 보고 그 철폐를 지향한다. ◇ 2024년, ‘문명전환정치’의 원년 문명전환정치 역시, ‘정치의 전환’을 고대한다. 체제전환정치의 문제의식에도 적지 않게 공감한다. 그러나 문명전환정치는 이들과 또 다르다. 문명전환정치는 생태적·사회적 파국의 근본 원인을 근대 서구문명으로 본다.그리고,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개인’을 전제로 하는 근대 정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한다(물론, 왕정의 철폐와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근대정치의 엄청난 성취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과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3월 대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일정은 한국에서의 ‘문명전환 정치’의 출발점이다. 팬데믹과 기후재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참혹한 전쟁, 그리고 성큼 다가온 AI시대의 경험이 정치화되는 첫 번째 시기이기 때문이다.향후 몇 년은 서구적 근대문명 이후의 정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최초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문명전환’ 및 ‘새로운 문명의 태동’이 정치적 소통의 주제로 등장하고, 문명전환을 표방하는 정치결사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비-인간 존재의 정치를 제기하고, 근대적 원자적 민주주의를 넘어 깊은 마음의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다. ◇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 ‘전쟁 같은 삶’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가속되는 전 지구적 기후재난과 유라시아와 중동에서의 살육과 전쟁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는 체계의 ‘자기파괴’로써 종말의 신호이다.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제로성장 및 저성장과 트럼프 현상 및 정치적 무능력은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리셋(reset), ‘다시 개벽’ 아니고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경험하는 기후급변과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치체계의 무능력은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이다.‘위기’는 체계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개념이다. ‘종말’은 기존 체계의 ‘한계’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망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그 자체는 소멸될 수 없다.여기서 ‘종말’이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들은 지배적 지위를 향해 치열하게 ‘경합’ 중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론’이 아니라, ‘종말론‘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서유럽이 경험하는 정치체계 및 경제체계의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부 일본 언론이 말하는 “대한민국은 지금 정점이고, 이제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론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명전환정치의 관점은 이를테면, 체제전환정치의 탈성장론(de-growth)과 명백하게 다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을 이미 저성장-제로성장시대에 진입했다.자본주의가 끝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단 미국만이 패권국가로써 예외적으로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념적인 구호를 앞세운 ‘탈성장 체제전환론이 아니라, ‘포스트성장(post-growth)’의 관점에서 성장시대 이후의 새로운 경제형식의 태동과 작동을 관찰하고 발달시켜야 할 때이다. ◇ 새 문명들의 태동과 생명-문명의 염원 그렇다면, 문명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역사를 통해 경험하듯이,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통한 ‘배치의 재-배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그러므로 무엇보다 삶-사회-문명의 ‘변이’들이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들은 이미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동시에, ‘융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AI-로봇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변이들이다.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포스트 근대문명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문명들’이 태동하고 있다.(문명은 항상 문명들이다. 근대서구문명은 다만 지배적 문명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하나의 문명적 변이가 생명-문명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을 중심가치로 하는 문명의 태동을 목격한다. 일본의 재난영화들의 생명사상과 테크노-애니미즘, 라틴 아메리카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와 다(多)-자연주의, 전 세계적인 샤머니즘 열풍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일본이 주목된다. 복잡계이론에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일본은 적절한 예가 되고 있다.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란 다시 말하면, 새로운 문명의 싹이 트는 시간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일본의 재앙은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30년의 저성장, 제로성장은 성장시대 이후 삶·사회의 형식을 발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후쿠시마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같은 대재난은 일본사회의 탈-이념을 가속시키고, ‘생명’ 중심 사회들의 출현을 자극했다. 포스트 근대문명 사회의 미래를 일본의 지역사회와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한다. 한국에서도 ‘생명’을 키워드로 하는 문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생율은 ‘생명의 저항’의 징표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생명이 기존의 사회적 체계를 견딜 수 없다면, 떠날 수밖에 없다. 종말하는 옛 사회의 틈새에서 새로운 사회를 발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살림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같은 전통적인 생명운동만이 아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는 2022년 ‘생명문명’을 선언했다. MBN의 대표적인 간판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의 장기흥행도 예사롭지 않다.9월 초 보은에서 열린 ‘동방마녀축제’와 11월 초 해남에서 열린 ‘대동굿’도 문명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전라북도는 2021년 이른바 ‘생태문명전환조례’를 통과시킨 바 있다.개발의 논리 속 보여주기식 입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이른바 ‘좋은’ 일자리의 부재와 높은 진입장벽은 탈-정규직과 탈-직업을 강제한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의미심한 현상은 탈-사회화와 아나키적 ‘은둔’이다. 우리의 척도는 ‘생명’이다. (기존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해 ‘생/명’이라는 기호를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생명은 인간생명이나 유기체적 생명에 머물지 않는다. 신체적이면서도 거룩한 ‘물질/비물적’ 생명이며, 먹혀야 먹을 수 있는 ‘역설’의 생명이다.또한 살아나고 살아지고 사라지는 ‘순환’의 생명이다. 명철한 ‘이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감응하는 ‘정동’의 생명이다. 아름다운 감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공허의 생명이다. 생명의 문명은 생명감(生命感)과 생명관의 급진적 전환을 전제한다. ◇ 살림정치2.0: ‘그늘’을 정치화하기 오늘날 소통되고 있는 ‘생명정치’ 개념은 푸코와 아감벤 등과 같은 유럽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권력에 의한 인간생명의 훈육과 통제(푸코),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벌거벗은 생명’, 아감벤)를 다루었다.반면, 들뢰즈-가타리에 영향을 받은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삶정치)’는 인간생명 개념과 유기체 생명 개념을 넘어서 체계에 저항하는 생명의 잠재력에 주목한다.‘권력’의 생명정치에 맞서는 ‘생명’의 생명정치인 셈이다. 최근 신유물론의 생명정치는 인간 생명을 넘어서 인간 너머의 생명, 나아가 생명의 조건으로써 비-생명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사물정치(cosmopolitics)’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생명정치는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론과 신유물론의 사물정치 개념을 참고하면서, 동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인 생명 사유에 주목한다.특히 1980년대 이후 김지하를 비롯한 한국 생명운동의 생명정치 담론에 유의하여, 살리고-죽이는 ‘역설’의 생명정치, 기쁨의 사건을 사회화하는 ‘신명’의 생명정치를 발명하고자 한다.나아가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우주생명 정치로의 확장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는 담대한 우주론과 새로운 인간관 및 문명론을 포함한 ‘다시개벽정치’로 연결된다. 우리는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이 활기차고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생산하는 ‘생/명(生/命)’ 살림정치를 염원한다. ‘활생(活生)·활명(活命)’의 세상을 꿈꾼다.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닌, 비인간을 포함해 삶을 나누는 ‘공생체’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라는 매체를 통해 역동적으로 소통되고 생산될 수 있다.우리가 ‘권력’과 ‘정치’를 이야기하려는 이유이다. ‘탈성장사회’가 아니라, ‘포스트성장사회’를 강조하고, ‘고양이당’을 상상하고, ‘직업’이 아닌 ‘생업(生業)’의 일자리 패러다임을 실험하는 이유이다.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를 논의하려는 이유이다. ‘개벽정치’의 서사를 창안하려는 이유이다. 생명-살림정치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살림정치’가 선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2011년 10월의 일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이 출범하였다.그해 12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이듬해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은 “민주주의와 성평등 그리고 생태 평화가 존중되는 생활정치, 살림정치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살리는 정치’, ‘돌보는 정치’, ‘나누는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살림정치의 가치를 확산하는 살림포럼 운영과 후보인증 사업, 시민정치운동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살림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특정후보를 지지했고, 특정정당과 연계되면서 살림정치는 퇴색되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지만, 사상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 ‘가치’ 중심정치의 한계였다.결정적으로 섬세한 ‘세계감(世界感)’과 담대한 ‘세계관(世界觀)’, 그리고 섬세하고도 담대하고 아름다운 ‘세계상(世界像)’의 부재라는 한계였다. 김지하의 ‘그늘’의 은유는 살림정치의 차원변화에 큰 영감을 준다. 2004년 김지하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며,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를 화두로 던진다. 우리는 그것을 “그늘이 문명을 바꾼다”, “그늘이 정치를 바꾼다”로 다시 읽는다. 이를테면 생명정치는, 살림정치2.0은, 이를테면, ‘그늘의 정치’다. 그늘진 몸과 마음에 유의하는 정치다. 이때 그늘은 ‘그림자’와 구별된다. 그늘은 ‘사각지대’와 다르다. ‘비가시적인 것’에 유의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생명정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죽은 것, 죽음조자 부재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살려내야 한다. 바이러스와 미생물과 균류들로부터 외계인과 우주의 암흑물질까지. 인적 없는 산중의 요양시설과 반지하의 세 모녀가 그들이다.가자지구의 지하동굴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늘이 고통의 그것만은 아니다. 깨알 같은 즐거움과 가을 하늘 같은 티없는 평화의 순간도 있다. 인간과 사회와 우주의 신산고초(辛酸苦楚)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어떻게 권력과 연결할 것인가? 어떻게 ‘그늘’을 정치화할 것인가? 어떻게 ‘흰 그늘’의 빛나는 신명(神命)의 순간을 정치화할 것인가? ◇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의 전략적 목표는 기존의 정치적 구도, 특히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구도를 흔들고 문명전환정치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판을 흔들어 기존의 구도를 균열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전환정치 ‘연합’이 불가피하다. 이미 ‘정치전환’을 내세우는 수많은 정당과 정파들이 기존의 정치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이른바 ‘제3지대’를 명분으로 연대와 연합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다.생명정치도 여기에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명정치는 복수(複數)의 정치를 전제한다. 정치는 ‘정치들’이다. 수많은 전환정치들이 있다.진보정치와 보수정치를 비롯해, 젠더정치, 노동정치, 녹색정치, 디지털정치 등 수많은 정치들이 경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택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기준은 ‘좌/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 ‘진보/보수의 구도’ 흔들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좌파/우파 정치적 구도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한국 역시 분단으로 인해 그 어느 나라보다 첨예한 좌파/우파의 구도 속에 존재한다.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실존적 이념적 피해의식이 깊이 각인되어 크다. 그리하여, 지금껏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부르지 못하고, 좌파를 좌파라고 호명하지 못했다.이는 역설적으로 좌파/우파 구도를 넘어설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생명정치는 여기서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정치는 그들 사이에 차별성과 그에 걸맞은 세(勢)를 실질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풀어 말하면, ‘주머니 속 송곳되기’.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생명정치도 정치체계라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연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와 ‘정치전환’정치와 다르고, ‘체제전환’정치와도 구별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합(合)만으로 차원변화를 이룰 수 없다.생명정치가 문명전환정치를 선도하며 ‘주머니 속 송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기존의 ‘평면적 구도’를 뚫고 돌출하는 ‘수직적 돌파’의 힘을 보여주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구도의 발명을 열망한다. 그것은 기후재난시대의 라이프라인(life-line)과 같은 실제적이면서도, ‘초월적 돌파’의 힘을 가진 정동적이고 영성적인 격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탁월한 기예(技藝)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주머니 속 송곳 되기처럼, 우리는 스스로 정치체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심금(心琴)을 울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2024년 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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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주요섭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한 여름 땡볕 아래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동료 교사들의 눈물이 아프다. 아들과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기후재난의 현장이 고통스럽다.정치문제 이전, 기후문제 이전 우리의 신체가 반응한다. ‘나’의 몸이 신음한다.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그러나, ‘정치’적 비상시국 이전에, ‘생명’의 비상시국이다. ◇ ‘생명’ 비상시국 이때 생명이란 무엇보다 ‘삶아있는 몸-마음’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몸-마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우울감으로, 좌절감으로, 열패감으로, 허기로 체험한다. 생명의 문제감각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있다. ‘나’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나’는 초월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다. ‘나’로 지칭된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이면서 또한 사회적인 것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이다.그러나, 이때의 ‘나’는 무엇보다 살아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생명의 나’이다. ‘살아있는 몸-마음’이다. 배고프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소멸의 공포를 느끼는 ‘생명의 나’이다.기쁨을 나누고 마음을 열고 환대하며, 또한 환희하고 열반하는 ‘생명의 나’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욕망하고, 포기하고, 또한 저항하는 ‘생명의 나’이기도 하다. ‘생명의 나’를 자각하고 나면 외부가 다르게 느껴진다. ‘생명의 나’의 외부는 물질세계이기도 하고, 사회세계이기도 하고, 생태계이기도 하지만, 이제 세계는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세계’로 경험된다. 외부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타아(他我)’가 된다.그/그들은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마음을 지닌 또 다른 ‘생명의 나’가 된다. 고양이의 눈빛이 정겹고, 먼지로 뒤덮인 길가의 화초들이 애처롭다. (감정이입만이 아니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웃들과 회사의 동료들이 사회적 역할이나 직책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경험된다.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적 변화가 예사롭지 않고, 상처받기 쉽고 늙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요컨대, 사회적인 것 아래,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생명세계의 실존이 체험된다. 그렇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오늘날 가장 절박한 문제는 ‘생명’ 문제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생태적 재난은 객관적인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이제 생태문제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공동체(공생체)의 절멸과 죽임과 고통의 문제이다. 그리고 죽임과 고통의 현실은 두려움과 우울의 ‘정동(情動)’을 격발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파국시대의 정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세계를 ‘대전환기’라고 말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와 체계(시스템)가 생명의 지속과 번영을 지지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자원수탈 및 생산력의 무한성장에 기반한 기존의 경제시스템은 제로성장과 저성장으로 이미 한계를 드러냈고,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시스템도 ‘진영화’된 이해집단과 생명-생태문제 등에 효과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무한 경쟁과 무한 능력주의의 직업시스템과 교육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근대적 의미세계 전체가 ‘시스템 종식’의 위기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른바 ‘근대문명의 종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나타내는 한국사회는 근대문명의 반생명성과 시스템적 한계의 치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의 몸-마음’이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정치공동체’ 이전에 ‘생명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다. 아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몸-마음’이다.비상품적 인간관계에 허기지고, 공생체(共生體)를 열망하는 ‘살아있는 몸-마음’이다. 정치의 최종심급은 우리가 가끔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름답고도 거룩한 ‘생명의 마음’이다. 그런데, 생명정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생명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요구된다. 요점은 이렇다.(일반적인 생명권력이론과 다르게) 생명사상의 관점에서는 권력이 (인간)생명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명 스스로 자신을 길들인다는 것이다.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들이 그렇듯이 생명의 훈육은 항상 ‘자기훈육’이고, 그것은 ‘생존의 기술’인 것이다. ‘타자복종’이 아니라, ‘자기복종’인 것이다. (‘자율’이라고 말해도 좋다.)복종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더 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복종은 ‘인격적 복종’이 아니라, ‘결정에의 복종’이다. 코로나 백신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주민등록도 그렇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국가가 생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이 사회적 층위에서 국가를 생성해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생명을 과도하게 길들이려 한다면 저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들뢰즈) 기존의 시스템을 전북하고, 또 다른 ‘자기복종 형식’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모든 정치는 ‘생명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코드’로 표현된다. ‘경제성장/경제침체’이라는 코드, ‘민주/반민주’라는 코드, ‘정의/부정의’라는 코드가 그것들이다. 생명정치는 ‘경제성장’ 정치, ‘부국강병’ 정치와 다른 길을 지향한다. 한국경제를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은 이미 포스트 성장시대에 진입했다. 저성장, 제로성장을 피할 수 없다.억지 경제성장 드라이브는 지금까지의 성과마저도 무너뜨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극단화되는 ‘부국강병’의 정치를 목격하고 있다. 한계상황의 돌파구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 결과는 전쟁과 파멸일 수밖에 없다. 생명정치는 무엇보다 ‘이념정치’와 구별된다. 부연하면, (좌파든 우파든) ‘정치적 올바름’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도덕(선악)정치’, ‘진리정치’와 대별(大別)된다.이념정치, 도덕정치, 진리정치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기 때문에, 상대방의 ‘청산’과 ‘척결’을 정치의 목표로 삼게 된다. 생명정치는 ‘(적폐)청산정치’와 ‘(좌파)척결정치’와 같은 배타적 진리정치에 동의할 수 없다.이들은 국민의 적대감을 양산하면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한다. 특히, 한국 진보의 경우, 진리정치 과잉이 역설적으로 진리정치의 이른 종말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목격되는 ‘가짜/진짜’ 정쟁은 ‘진리정치’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또한, 생명정치는 ‘환경정치’ 및 ‘생태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환경정치와 생태정치가 인간과 사회의 조건으로써 객관적 생태계에 주목한다면, 생명정치는 인간생명을 비롯한 생명의 내면과 마음의 흐름에 주목한다.예컨대, 기후변화는 인류의 종말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사실’이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후우울’이 시사하듯은 기후문제는 이미 ‘생명의 마음’의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정치는 기존의 구별 도식을 뛰어넘는 도약적 차원변화를 기대한다. ‘초월적 돌파’를 고대한다. 생명운동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이변비중(離邊非中)’의 차원변화가 그것이다.이변비중은 원효의 말로, 직역하면 “양 끝을 떠나되 중간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핵심은 ‘중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중간(中間)’과 중도(中道)는 구별되어야 한다. 진보/보수의 중간, 좌/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우, 진보/보수의 구도 자체를 점프해 새로운 구도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 ’구공존이(求空存異)‘, 생명정치의 원리 생명정치의 원리는 ’구공존이(求空存異)‘다. 그것은 ’구동존이(求同存異)‘와 구별된다. ’구공존이‘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원초적 공허함’이 강조된다. 진영들의 척도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공(空)’을 구하고 ‘차이(異)’을 인정한다는 것은 현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이의 생성 가능성을 의미한다.‘공허의 지대’는 ‘비구별의 상태’로 ‘생기(生氣)’적 사건의 장이며 ‘정동적’ 사건의 장이다. 생성과 창조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공’을 구하되 ‘차이’를 생산하지 않으면 생명체는 살 수가 없고, 사회는 자기생산을 할 수 없다. 구별하고 비교하지 않으면 문명사회는 불가능하다. 구공존이를 생명정치에 적용하면,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된다. 하나는 ‘무지(無知)의 정치’다. 이를테면, ‘확실성의 정치’에서 ‘무지의 정치’로서의 전환이다. 이때 ‘무지’란, 물론 ‘무지의 지’를 말한다.다시 말하면, ‘맹점의 자각’이다. ‘볼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없는’ 삶-사회의 조건에 대한 깨달음이다. 진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영의 맹점을 인정하면서, 연찬(硏鑽)과 향연(饗宴)을 통해 풍요로운 ‘협력/경합’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접근할 수 있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방류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없음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전 지구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지질학적 훼손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일본 어민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당신들은 바다를 모른다.” (이는 기후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지의 기후-생태학’이 요구된다.) 그러나, ‘구공존이’의 ‘공’은 인지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존재론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궁한 잠재력으로서의 공(空)의 역능에 유의한다.‘공’의 생성능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킨다. ‘공’이라는 ‘미지의 지대’이자 ‘비구별의 지대’는 허무의 끝이 아니라, 풍요의 원천이다. 영점장(零點場)과 같은 무한에너지의 현장인 것이다. ‘구공존이’의 존이(存異)는 다(多)맥락적 사회, 다(多)세계적 세계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다진영적 정치, 다당제적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예컨대, 생명정치는 생명문제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디지털기술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해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존이’는 타자로 인식된 진영들과의 협력을 강제한다. 구공존이의 생명명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정치의 전환’을 실험할 수 있다. 정치체계를 포함해 사회적 체계의 핵심이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전제하에서, 첫째, 정치적 소통의 ‘주제’를 ‘투기 경제’에서 ‘삶-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것, 둘째, 정치적 소통의 ‘방법’을 ‘이성적 판단’에서 ‘생명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것이다. ◇ 정치적 소통 ‘주제’의 전환 : ‘투기경제’에서 ‘삶-생명’으로 지금까지의 정치적 소통의 핵심 주제는 ‘경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살림살이경제’와 구별되는) ’투기경제‘, 혹은 ’부자되기경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자본으로써 ‘능력’이었다.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생명을 갈아 넣어야만 가능한 반생명적인 ‘악마적 거래’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관점에서, 이제 우리의 정치적 소통의 주제는 ‘주식’이나 ‘부동산’, ‘코인’이 아니다. 투기 ‘능력’이 아니다. ‘삶-생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생명으로서의 나’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때 ‘삶’이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다. 지난 생애의 삶이 투기적 삶이었다면, 이번 생애는 ‘아름다운 삶’, ‘건강한 삶’. ‘멋진 삶’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 정치적 소통 주제가 된다.‘자신의 환상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노년의 자신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영국 정부에 있다는 ’외로움 장관‘만이 아니다. ’저녁이 있는 삶‘ 장관, ’존엄한 죽음‘ 장관, ’꿈을 또 하나의 현실로 만들어주는‘ 장관을 둘 수도 있다.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영역으로 자유경쟁에 방치되는 편의점을 ’호혜적 시장경제‘의 생활-거점으로 지원하고,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에 기반한 ’공생체(共生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또 다른 지방세계‘의 탄생을 돕는 ’지방소멸/지방재생‘ 프로젝트를 만들 수도 있다.생기있는 도시공간 만들기, 15분 도시, 스마트폰 프리의 날, 사회적 깨달음 학교, (직업학교가 아닌) ’생업학교‘를 설치할 수도 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이야기했다는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때 ‘생물’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변화무쌍함을 가리키고 있지만, ‘생명’ 정치의 주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 생태정치: 기후변화, 생물종 절멸 등 생태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정치- 생활정치: 식의주학(食醫住學) 등 생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 예컨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핵심인 주택문제의 경우 ‘주택 사회주의’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생업정치: 직업이 아닌 ‘생업’(生業). 일자리에 대한 다른 접근. - 돌봄정치: 요양원 수용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돌봄체계- 모성정치: 탄생과 양육의 ‘어머니 마음’의 정치 - 존엄정치: 존엄하고도 평온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만드는 정치- 재난정치: 기후재난시대의 ‘생명선(life line)’을 예비하는 정치- 풍류정치: 생명친화적이면서 미학적인, 우리 전통문화의 흥과 멋을 살린 정치.- 사물정치: ‘사물들의 의회’와 ‘코스모폴리틱스’(라투르), 경물사상(최시형)과 인물균론(人物均論)(홍대용)의 제도화. - 마음정치: 심금을 울리는 정치, 생명의 마음과 감응하는 정치- 해방정치: 억눌린 생명들의 자기해방을 돕는 정치- 공성(空性)정치/영성(靈性)정치: 숭고지향을 드높이는 정치. 구공존이(求空存異)의 정치-등등 그 외에도 생명정치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생명정치는 개인의 욕구를 탐욕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생명정치는 (기업과 국가의 약탈적 자원사용을 외면한 채) 생태문제를 개인과 가정에 전가하는 개인컵 사용 캠페인에 유의한다.생명정치는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이분법적 사고’ 등 개인의 성찰로 환원하지 않는다. 생명정치는 화폐 만능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큰 ‘기본소득’에 찬성하지 않는다.생활주택, 생활임금 등 생활보장을 적극 검토한다. 생명정치는 이념적 성격이 강한 탈성장 체제전환론, 혹은 기후정의론보다, 포스트 성장시대에 걸맞은 다양하고 새로운 경제사회 시스템을 지금여기서 실험하도록 지원한다. 생명정치는 성적(性的) 미결정성과 자기선택을 존중한다. 등등. 그리고 또 한 가지, 생명정치는 ‘공간정치’와 비교되는 ‘시간정치’를 강조한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있다. 생명정치는 ‘공간’보다 ‘시간’에 주목한다.근대 산업문명에서 공간은 무엇보다 채굴과 개발의 대상이었다. 생명정치는 ‘생장소멸’하고 ‘생로병사’하는 우리의 실존적 생애주기와 생태계의 생명시간에 유의한다.진보/보수의 ‘선형적 시간’과 구별되는 ‘확산적 회귀의 시간’을 탐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에서 종말을 향해 가는 ‘시종(始終)의 시간’과 구별되는, 종말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종시(終始)의 시간에 주목한다. ‘다시개벽의 시간’에 주목한다. 생명정치는 ‘제국 일본’이 아니라, ‘잃어버린 30년의 일본’에 주목한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일본은 ‘실패한 국가’일지는 모르지만, ‘실패한 사회’만은 아니다.재난시대의 ‘라이프 라인(life line)’을 제도화하는 일본. 재난 경험을 통해 ‘이념’ 과잉과 ’의미’ 과잉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일본(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참조). ‘탈이념’과 ‘탈의미화’ 속에서 동시에 허무주의를 경계하는 일본. ‘신체’와 ‘정동’을 새로운 삶의 준거점으로 제시하는 일본. 재난 이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일본사회에 주목한다. 그리고, ‘생명경제’가 있다. ‘생태경제’만이 아니다. 30여전 년 접했던 일본의 지역자립의 경제학과 생명의 경제론이 떠오른다(『공생의 사회 생명의 경제』). 19세기 유럽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생명경제론’이 있었고, 21세기에는 자크 아탈리의 『생명경제로의 전환』이 있다.그리고, 심지어 ‘전북특별자치도’는 이른바 ‘생명경제’를 비전으로 제시한다(구체적인 프로그램에는 의문이 있다. 예리한 관찰이 요구된다.) ◇ 정치적 소통 ‘방법’의 전환 : ‘시비’를 기리는 정치에서 ‘심금’을 울리는 정치로‘심금(心琴)을 울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때 심금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 미묘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다. 생명정치가 ‘생명의 마음’의 정치라면, 다시 말하면 ‘심금을 울리는 정치’ 아닐까.그러나,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의 마음’이지만, 정치엔 정치 나름의 문법과 작동원리가 있다. 정치와 마음은 ‘정치/마음’의 형식으로 연동되고 있지만, 마음을 정치체계로 ‘직접’ 배달할 수는 없다.정치와 마음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유권자의 마음은 (여론조사와) 투표를 통해서만 정치화될 수 있다. 정치적 메커니즘을 통해 번역되고, 정치적 문법으로만 작동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민주/반민주’나 ‘국가/반국가’라는 정치적 코드는 사람들 마음에 ‘직통(直通)’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 경험과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미 반응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거꾸로 열망과 염원의 마음 역시 정치적 코드화되어야 한다. (이때 코드화는 잠정적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성공은 정치적 코드화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대표적인 것이 ‘민주/반민주’ 코드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민주화운동은 무엇보다 생명을 능욕하고 파괴하는 권력에 대한 생명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저항의 정치적 형식은 민주/반민주의 민주화투쟁일 수밖에 없다.그리고 ‘민주적인 것’과 ‘반민주적인 것’의 다양한 기준, 조건, 사례가 만들어지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장착된다. ‘정강정책’도 그 중 하나이다.(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생명정치는 정강정책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다.) 이제 ‘코드’는 ‘서사’와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1987년 6월 극적인 ‘민주항쟁의 승리’로 귀결된다. 생명정치의 코드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명/반생명’이다. 그러나 생명정치적 사건은 코드만으로 촉발되지 않는다. 코드를 감싸고 있는, 코드에 들러붙어 있는 ‘정동’, ‘감응’, ‘유령’, ‘귀신’으로 이름붙여진, 다시 말하면 ‘신령한 힘’에 의해 격발된다.생명정치의 본령은 여기에 있다. 심금을 울려야 하는 것이다. 심금을 우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의 심금을 울리는 방법과 집단의 심금을 울리는 방법이 그것이다.이때 집단이란 생명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예컨대, ‘큐피드의 화살’과 ‘만파식적의 피리소리’가 그것이다. 이것들로부터 생명정치의 원형적 기예(技藝)를 배운다.(기존 정당들 역시 이미 생명정치, 정동정치의 기술을 구사해왔다. 경조사를 챙기며 슬픔과 기쁨을 같이하고, 식사자리와 술자리를 통해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대규모 정치집회에 관광버스를 동원해 스킨십을 넓히고 정동적 감응을 강제한다.) ‘큐피드의 화살’ 되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큐피드의 화살’의 타겟은 그/그녀의 심장이다. 두뇌가 아니다. ‘사랑’은 ‘생각’을 통해 격발되지 않는다.사랑의 마음 역시 원천적으로 신체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동시에 형태가 없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정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큐피드의 화살은 ‘정(情)이 들고’ ‘정(情)이 쌓이는’ 마음을 조준한다.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판단이 연결되면서 감정이 격발된다. 그간 ‘정치적 사건’으로써 화살쏘기는 늘상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진보파의 화살은 주로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이념, 가치, 의미, 정책과 같은 이성적인 것들이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의 화살을 쏘았고,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살짝 걷어내면, 그때의 화살 역시,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민들의 가슴을 격발한 것으로 보인다. 신체적 억압, 억눌린 마음과 자유의 염원이 폭발된 것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 되기: 만파식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영험한 피리로써, 직역하면 ‘일 만개의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이다.‘큐피드의 화살쏘기’가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직접적인 개인의 감정의 격발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만파식적의 소리는 비-개체적이고 비-가시적으로 세상 전체를 조율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만파식적은 소리의 힘으로 질병을 물리칠 수도 있고,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다. 산천초목을 편안케 할 수도 있다. 특히 만파식적은 듣지 못한 이들에게도 감응되는 우주적 울림이다.그리고, 만파식적의 영험한 소리는 아름답고 담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만파식적은 기후재난과 팬데믹 시대, 전 지구적 생명공동체를 평안케 하는 지구적 생명정치의 ’기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큐피드의 화살이 개인의 마음을 향한다면,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공명한다. 큐피드의 화살이 ’감성정치‘라면, 만파식적은 이를테면, ‘신명정치’다.‘영성정치’다. 신명정치는 이를테면 ‘특정한 감정을 격발하기’보다 ‘공(空)’의 에너지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기존의 도식과 구별과 프레임을 해체하는 ‘초월적 돌파’의 에너지를 소망한다. ‘생명정치’란 이를테면, ‘큐피드의 화살’의 정치이며, ‘만파식적’의 정치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화살들’과 ‘피리들’이 있다. 모토, 구호, 슬로건, 몸짓, 심벌, 아이콘, 이미지, 그림, 노래, 의례 등등이 그것들이다.이것들은 모두 유권자의 마음을 향한다. 한 번이 아니다. 수없는 화살이 반복적으로 날아가고, 그것은 친근한 ‘이야기’로, 담대한 ‘서사’로, ‘대서사시(詩)’로 종합된다. 큐피드의 화살이나 만파식적도 하나의 이야기거니와, ‘산업화’와 ‘민주화’ 역시 하나의 서사였던 것이다. ◇ 생명정치, 2024년 총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과정에서 생명정치의 ‘무리(黨)’가 형성된다. 150여년 전 수십년 간의 개접/파접(開接/罷接)의 감응체험과 수많은 조직사건 등을 통해 형성된 ‘동학의 무리((東學黨)’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무리’와 ‘주체’는 구별된다. ‘주체’가 영속적이고 초월적이라면, ‘무리’는 일시적이고 경험적이다. 반복적이고 재귀적인 ‘무리 경험’이 또 다른 무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무리’는 ‘세력’이 된다. 생명정치 세력 역시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수 없다. 한 번의 사건 만들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무리가 형성되고, 생명정치 사건이 거듭되면서 세력은 확대 강화된다. 다시 말하면, 사건을 통해 ‘출현’하고 반복을 통해 ‘구성’된다.노동자계급이 노동투쟁을 통해 형성되고,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시위를 통해서 형성되듯이. 생명평화 탁발순례 5년을 통해 생명평화결사가 만들어지고, 생명평화 진영이 생겨났듯이. 그렇다면, 또 다른 사회적 무리와 세력으로 거듭난 ‘새로운 우리’를 우리는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은 하나의 기회이다. 한국정치가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정치가 노동정치, 젠더정치, 생태정치처럼 정치적 시민권을 얻게 될 수도 있고, 혹 ‘초월적 돌파’의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삶-생명이냐, 아니냐?’의 새로운 정치적 구도, 새로운 정치적 진영이 형성될 수도 있다. 정치적 전환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한계상황의 강도(强度)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시 물어야 한다. “한국정치는 바닥을 찍었는가?” “바닥을 뚫고 올라올 힘이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추락을 떠받치고 있는 낡은, 그러나 단단한 기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단단하지만 낡은 기둥일 수도 있다.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아직은 가시화되지 않은, 새로운 무리와 세력의 부재이다. ‘숲의 천이(遷移)’에서 볼 수 있듯이, 전환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떡갈나무의 발아와 성장과 확산만이 숲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多)세계적’ 세계관으로 볼 때, 전환이란 ‘단일한 세계’의 변혁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통해 세계들을 재배치하는 일이다.세계가 세계들이고 사회가 사회들이라면, 새로운 사회의 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전체사회의 배치를 재배치할 수 없다.‘더 많은 민주주의’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협력/경합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의 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이념, 새로운 정치의 ‘주제’와 ‘방법’이 요구된다. 우리에게 그 이름은 ‘생명정치’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정치적 변이’의 태동과 전염과 확산을 격발할 정동정치적 사건의 현장이다. 정동정치적 축제들이다.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발은 그 1년 전 보은취회에서의 수만명 동학당들의 ‘공생체(共生體) 식사’와 시천주(侍天主) 주문과 풍물굿으로 고양된 ‘정동적 힘’, ‘공명의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올가을, 수많은 큐피드의 화살들과 만파식적들이 공명하는, 전라도 고부 들녘에서의 ‘생명정치 페스티벌’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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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1□ 전국 각지에서 6·25전쟁 제72주년 기념행사 개최◇ 정부는 지난 25일 장충체육관에서, 국무총리, 재향군인회 및 참전용사, 시민 등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72번째 6.25전쟁일* 기념행사를 개최,* UN참천국(22개국)에서 195만 명이 참전, 국군 62만 명과 민간 99만 명이 피해○「지켜낸 자유, 지켜갈 평화」라는 주제로, 호국영웅의 희생으로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을 지속 가능한 평화로 지켜가자는 메시지 전달◇ 전날인 24일에는 신라호텔에서 윤대통령 주재로 국군 및 UN 참전용사 초청 오찬행사를 진행하고, 이들에게 ‘평화의 메달’을 수여◇ 또한 17개 시·도를 비롯한 전국 140여 곳에서도 별도의 기념행사를 개최, 지역 유공자 초청 행사와 유가족 위문 방문 등을 진행◇ 이외에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고맙습니다’라는 주제로, 한달 간 순국선열 및 호국영웅에 대한 추념행사 및 선양사업 추진* 의병의날(6.1.), 현충일(6.6.), 6·10민주항쟁(6.10.), 제2연평해전(6.29.)◇ 한편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1년말 기준, 우리나라 국가보훈대상자는 본인(58만4,192명)과 유족(25만4,926명)으로 총 83만9000명으로 집계○ 지역별로는 경기도(19만4000), 서울(141천), 부산(6만) 순으로 많이 거주, 연령은 60세 이상이 70만 명(84.4%), 70세 이상이 575천명(68.5%)으로, 비수도권 道 거주비율이 전체인구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파악▲ 지역별 국가보훈대상자 현황 (단위:명)□ 새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을 강조◇ 새 정부는 △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109번) △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110번)를 국정과제로 선정하는 등 보훈정책 대폭 강화한다는 방침< 새정부 국정과제 주요내용 >과제중점 추진사항주요내용책임 지는 일류 보훈➊ 공정보훈 실현▪ 참전명예수당 인상 등 보훈대상자의 소독 보장 수준 강화▪ 신청인의 입증책임 경감하고 심사·등급기준 합리화➋ 보훈복지 강화▪ 연천현충원 조성 등 국립묘지 안장능력 대폭 확충(18만기)▪ 위탁병원 시군구별 5개소로 확대 및 이용연령 제한 폐지➌ 제대군인 지원▪ 전직지원금을 구집급여의 50% 수준으로 단계적 인상▪ 고용복지센터와 연계, 지역 기반 취업 지원 서비스 강화유공자 존중 예우국➍ 의무복무자 우대▪ 의무복무자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제대군인법 개정)▪ 위군 복무 기간의 근무경력 산입 의무화(민간까지 확대)➎ 보훈문화 조성▪ 제복 근무자(군인소방관경찰 등) 존중 범국민 캠페인▪ 미래세대가 활용가능한 보훈콘텐츠 플랫폼 구축➏ 독립운동 계승▪국민통합 계기 광복 80주년 기념사업 추진(’25년)▪독립유공자 후손의 생활안정 지원 강화◇ 정부는 국가가 먼저 책임지는 동록·심사제도와 공정한 보훈을 구현하기 위해 균형 있는 보훈·보상체계를 구축한다는 방침○ 희생·공헌에 합당한 보상의 원칙하에, 물가상승률 대비 높은 수준의 보훈급여금 인상, 저소득 보훈대상자 생활안정 지원 강화를 추진○ 특히 고령에 접어든 6.25전쟁 등 참전 유공자들을 위한 의료·요양·재활서비스를 대폭 확대하고 제대군인정책을 전반적으로 재편할 계획◇ 윤 대통령도 지난 현충일, 제복입은 영웅들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추념사를 비롯, 보훈정책 강화에 대한 의지를 지속 표명◇ 제67회 현충일, 추념사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영웅들의 사명이었다면, 남겨진 가족을 돌보는 것은 국가의 의무◇ 제72주년 6·25기념일, SNS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번영은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이룩한 것, 이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나라를 만들 것□ 자치단체에서도 다양한 보훈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 자치단체는 지역의 독립유공자·국가유공자 및 유족 등 보훈대상자에 대한 예우 및 생활지원을 위해 지속적인 보훈사업을 전개○ 전국 대다수의 자치단체가 ‘보훈수당 지원 조례’, ‘국가보훈대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 등을 제정·운영 중이며,○ 본인·유족에 대한 수당 지급과 복지혜택 확대 뿐 아니라, 주소불명 독립유공자를 찾아 서훈을 전수*하고, 각종 기념·선양사업 등도 전개* 미전수 인원 : (’19년) 5,970명 → (’20년) 6,253명 → (’22.3월) 6,822명시 ․ 도지자체별 주요 보훈 시책서 울▹지방에 거주하며 중앙보훈병원을 이용하는 보훈대상자에 숙소 제공, 애국지사 월100만원 보훈수당 지급, 65세 참전유공자에 월10만원 지급부 산 ▹독립유공자 및 유족 대상 무료 진료병원 지정운영(9곳), 6.25전쟁 참전 UN 전몰용사 추모제 매년 개최대 구▹6월 한달간 사이버 참배관(대구시 홈페이지) 운영, 특별위문금 지원,달구벌 보훈문화제 개최, 생계곤란 6.25 참전유공자 가정 자활지원금 지급인 천▹독립유공자 및 제대군인 등 대상 전용 안장시설(호국봉안담) 설치, 참전 명예수당 지급,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기념사업 추진대 전▹국가유공자와 유족 15천명에 인당 7만원 상당 지역화폐(온통대전) 지급, 독립유공자 외래진료비 및 약제비 중 본인 부담금 지원울 산▹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서훈 등급 상향 추진, 6.25와 월남전 참전유공자 중 전몰·전상자의 유족 대상 매달 참전유족수당 지경기▹경기광복유공연금 월100만원 지급, 중위소득 50%이하 국가유공자 생활 보조수당 지급대상 확대(6,771명), 독립유공자 외래진료비 무제한 지원충 남▹저소득 보훈가족 및 독거 참전 유공자 밑반찬 지원, 만 80세 이상 참전 유공자와 미망인에게 참전명예수당·보훈수당 지급, 버스요금 감면전 남▹6.25와 월남전 참전자에 참전명예수당(연36만원) 지급, 전몰군경 및 순직 군경 유족(2400명)에 보훈명예수당(연24만원) 지급 신설경 북 ▹보훈대상자 사망시 장례 의전차량 운영, 시·군 민원실-농협-대구은행(122개소)-보훈위탁병원(15개소)에 우대창구 마련, 나라사랑 이야기꾼제 주▹6.25참전 유족없는 학도병 대상 호국수당 신설(제사를 지내는 4촌 이내 유족 에게 지급), 참전유공자 배우자 복지수당, 현충수당 인상(15만원)□ 보훈 관련 주요 쟁점< 보훈정책 추진체계 관련 문제 >◇ ’61년 조직 출범 이후, 보훈처는 장관급과 차관급으로 격상·격하를 거듭, 현재 총리 소속 기관으로 처장은 장관급이나, 국무위원은 아닌 상황* (’61년) 차관급 군사원호청 → (’62년) 장관급 원호처 → (’84년) 장관급 국가보훈처(이후 명칭동일) → (’98년) 차관급 → (’04년) 장관급 → (’08년) 차관급 → (’17년~현재) 장관급○ 이에 일각에서는 정권 기조에 따라 기관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유공자·제대군인 등에 대한 예우와 직결된다며, 국가보훈부 승격을 주장○ 보훈처도 미국의 보훈부(Department of ◇eterans Affairs, 28만명 근무) 등 선진국 사례와 제대군인만 1,700만명에 이른다면서, 승격을 지속 요구* 박민식 보훈처장은 지난 20일 국회 토론회,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보훈부 승격 필요성을 주장○ 이에 대해 部는 상징성 뿐 아니라 국정전반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국무위원으로서 역할도 고려되어야 하며, 기관 위상과 유공자 등에 대한 예우 문제는 별개라는 반론도 제기되어, 향후 논의는 지속될 전망◇ 한편 보훈 관련 특별지방행정기관 필요성 논의도 지속되는 상황* 현재 6개 지방보훈청(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제주)과 21개 지청으로 운영○ 일각에서는 지방보훈청 업무는 대부분 자치단체에서 중복 추진되는 업무이며, 중복되지 않는 업무도 자치단체 이양에 적합한 사무라고 주장○ 이로 인해 예산·인력이 중복되거나, 사무의 관할이 모호해 실질적 관리가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고 지적* 실제, 지역 내 각 현충시설별로, 관리주체와 관리 기준이 달라 정확한 현황 파악 미흡○ 반면 국가유공자는 자치단체 여건·특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국가차원의 공통된 예우와 지원이 필요하므로 존속해야 한다고 보는 반론도 제기< 보훈 대상 유형 세분화 및 보훈수당 격차 문제 >◇ 현재 보훈대상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 전몰·전상·순직·공상군경, 무공수훈자, 4·19혁명 유공자, 6·18상이자 등 16개 유형으로 분류○ 일각에서는 보훈대상이 광범위하고 유형이 세분화되어 있어, 상이군경·전사자 등 희생이 큰 유공자에게 혜택이 집중되지 못한다고 문제 제기** 미국은 전사자 유족, 상이군인과 가족, 장기복부 제대군인, 참전군인으로 한정○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전쟁부터 민주화까지 단기간 압축적인 현대사를 겪음으로 인해 유공자가 많을 수 밖에 없다며, 희생과 공적에 따라 예우·지원을 차등하도록 유형을 세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반박◇ 한편 지역에 따른 각종 보훈수당 등의 격차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 시·도별 격차 뿐 아니라, 동일 시·도 내 시·군별로 보훈수당 지급액과 지급시기를 달리하는 경우도 상당수** 보혼처 자료에 따르면, 현재 26개 기초자치단체는 별도 보훈수당 미지급, ◇◇도의 경우, 최소는 분기별 6만원(△△시), 최대는 월 11만원 지급(◇◇군)○ 또한, 조례를 통해 생계·의료급여 수급자를 지급대상에서 제외하는 지역이 있는 반면, 예외없이 포함하는 지역도 존재○ 이에 대해, 동일한 희생과 공적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예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나, 일각에서는 자치단체 차원의 추가 수당 지급은 재정여건에 따라 달리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 사회적 합의·국민 공감대에 기반한 보훈정책 수립 필요◇ 전문가들은 보훈정책이 국가에 희생·헌신한 자에 대한 예우와 보상, 이를 통한 애국심 고취와 사회통합을 주목적으로 시행되는 만큼 정부정책 중 가장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는 분야라고 지적○ 정치적 요인에 따른 보훈정책의 급격한 전환은 탈피한 것으로 보면서도 사안별로 쟁점은 잠재되어 있다고 평가 * (예시) 좌익 독립운동가 등◇ 보훈정책의 추진체계부터 대상자 선정 기준과 구체적 지원방안까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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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2주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개최◇ 5· 18기념행사는 5·18 발생 이듬해인 ’81년부터 피해자·재야세력 등이 주관하는 추모식에서 시작, 전두환정부 탄압 속에서도 매년 개최○ 이후 김영삼정부 들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차원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97년부터 정부가 법정기념일로 지정해 지금에 이름◇ 5·18에 대한 공식명칭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흐름에 따라, 변천을 거듭○ (전두환정부) 광주사태 → (노태우정부) 광주민주화운동 → (김영삼정부) 5·18광주민주화운동 → (김대중정부~현재) 5·18민주화운동◇ 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번째 국가공식 기념행사인 제42주기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 국무위원·여당의원·수석비서관 등이 대거 동행한 가운데, 기념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국민통합을 강조◇ “자유민주주의의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정신은 바로 국민통합의 주춧돌”, “오월의 정신이 우리 국민을 단결하게 하고 위기와 도전에서 지켜줄 것”◇ 또한, 매해 참석*을 유족에게 약속하고,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논란을 빚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09~’16년 공식행사 제외)에도 참여○ 대다수 언론에서는 국민통합에 기여한 행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 역대 대통령 참석 : 김대중(’00년, 1회, 최초 참석), 노무현(’03~’07년, 5회), 이명박(’08년 1회), 박근혜(’13년 1회), 문재인(’17·’19·’20년, 3회)□ 지역사회 여론·동향◇ 3년만에 개최되는 대규모 기념식과 부대행사에 추모 열기 고조○ 지난 주말 5·18민주묘지에 전국 각지에서 7만 여명의 참배객이 다녀가는 등 광주·전남지역 내 추모 분위기가 조성○ 17일에는 코로나 확산으로 축소·중단되었던 전야제가 3년만에 개최되면서, 광주 금남로 일대에 인파가 운집하며 축제 분위기도 연출○ 전남도에서도 지난 14일 5·18민주화운동 제42년 기념식과 함께 나눔과 연대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오월문화제 등의 행사도 개최○ 무안군은 시위대 버스 재현극을, 함평군은 518마리의 흰나비를 날려보내는 행사를 개최하는 등 전남도 내 시·군도 기념행사를 진행◇ 5·18 유관단체와 광주·전남에서는 5· 8을 전후해 추모 메시지를 발표◇ 5·18기념재단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을 환영하면서,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과 관련해서는 “이미 세워진 공감대를 재확인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포석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 5·18민주유공자회42년이나 지났지만 당시 진실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앞으로는 올바른 역사인식 속에서 5‧18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밝힘◇ 이용섭 광주시장“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밝힘※ 새정부 지역공약인 ‘5‧18 국제자유민주연구원 설립의 조기 실현을 뒷받침할 것도 지시◇ 문금주 전남도권한대행“코로나19 위기 극복도 연대와 나눔이라는 오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하며, “숭고한 오월정신을 본받아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밝힘◇ 한편 광주·전남 시민사회는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대통령과 여·야의원, 장관들의 대거 기념식 참석에 환영하는 입장을 표명○ 특히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에 대해 국민통합을 위한 의지로 평가◇ 또한 5·18이 지역행사를 넘어, 전국적 행사로 자리잡아 가는 양상○ 타 자치단체에서도 자체 기념행사를 개최하거나, 시·도지사(권한대행)·시도의회 명의로 성명, SNS 등을 통해 추모 메시지를 내는 상황◇ 특히, 달빛동맹으로 굳건한 협력관계인 대구시의 동참이 부각○ 대구시장, 시의회의장 등 20여 명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 이후 광주시 주관행사인 ‘민주의 종 타종식’에도 참여해 민주·인권 등 광주 정신 확산과 영호남의 화합, 국민통합을 기원※ 지난 ‘13년 ‘달빛동맹 공동협렵 협약’ 이후 대구 2·28민주운동 기념일, 광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교차 참석◇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난 민선 7기 동안 달빛동맹이 더욱 단단해졌고, 큰 성과도 이뤄냈다”며, 양 도시가 국민통합과 국가균형 발전의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고 밝힘◇ 한편, 일부 지역 내 진보 청년단체에서는 지난 4월 말부터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전개○ 지난 17일, 835명의 온·오프라인 서명을 받아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5·18단체들과 지역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한 상황*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은 5·18민주묘지가 정치적 이해관계의 장이 돼서는 안 된다며, 누구도 기념식 참석을 막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지적< 자치단체별 5·18 관련 행사 및 분위기 >시도주요 내용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기념식과 5·18 민중항쟁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지난 12일에는 서울시청에서 제3회 5·18 영화제를 개막부산▹시 공식 SNS를 통한 추모 메시지를 게재하고, 부산민주주의행동 추진위 원회 등 시민단체의 주도하에 5·18 민중항쟁 부산 기념식을 개최대구▹대구시장의 광주방문과 별개로, 광주 밖의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고 지역에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비극이 함께한 ‘대구의 5월’을 기억하자는 목소리 제기울산▹5·18 민중항쟁 기념 울산행사위원회 주관으로 추모분향소를 운영하고, 관련 사진·그림 전시, 문화공연 및 주먹밥 나눔행사 등을 개최충북▹지역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날을 기념하며, 증평군수는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5·18 정신의 계승 필요를 강조충남▹’21년부터 도의 공식행사로 자체 기념식을 개최, 권한대행은 5‧18 정신을 바탕으로 ‘진실과 평화, 인권의 중심 더 행복한 충남’을 향해 나아가자고 밝힘전북▹전북대 및 시민단체에서 이세종열사 표지석 설치 및 관련 학술제 등을 진행, 많은 시민들이 전보다 5·18 민주항쟁을 더 가깝게 생각하는 분위기▹김제의 전라고 동문회에서는 이세종·조성만 열사 추도식을 진행경북▹이철우 도지사 후보는 5·18 정신을 통합·상생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발표▹지역에서는 5·18 기념식이 매년 정례행사로 지정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경남▹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도 주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초로 5·18 민주화운동기념식을 갖는 한편, ‘일해’공원의 명칭변경도 촉구제주▹5·18민중항쟁 정신계승 제주도민 문화제를 개최하는 한편, 제주 4․3과 광주 5․18을 잇는 청소년 평화공감 현장체험활동도 3년 만에 재개□ 정책적 시사점◇ 전문가들은 이번 기념행사에 대해 우리사회 내 다양한 갈등 또한 민주주의라는 큰 범주와 규칙 내에서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확인해 국민통합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라고 평가◇ 향후 이러한 국민의 인식과 갈등 해소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언○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새정부에서 설치 추진 중*인 국민통합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 * 입법예고(~5.17일), 차관회의(5.19.)◇ 과거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설치한 사회통합위원회·국민대통합위원회가 뚜렷한 성과나 존재감 없이 폐지된 점을 지적○ 그 원인으로 보수·진보 등 거대담론이나, 또는 지나치게 세부적인 타부처 소관 정책을 다루려고 했던 점이 문제라고 지목◇ 향후 국민통합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서, 대통령의 국민통합 행보 기획, 국민통합을 위한 메시지에 대한 자문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 위원회 설치 명분 및 성과 창출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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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우리는 87년 민주항쟁으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얻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적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장차 모든 국민이 더불어 잘 사는 민주공화국 참으로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다.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1994년부터 본격화된 세계화 논의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세계적 표준 주창 그리고 OECD 가입으로 우리나라는 박정희의 파쇼적 발전국가체제가 낳은 경제적 성과를 딛고 세계화된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발전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왔고 경제위기의 고통은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였다. 바야흐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사회체제는 박정희식 경제발전모델이 종언을 고하고 시장만능주의로 넘어간 것이다.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양극화사회로 구조화되어 버렸다. 한나라당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좌파정부의 무능을 꾸짖고 정부와 범여권은 이를 외환위기 극복과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한 발전의 10년이라며 한미 FTA의 체결과 함께 온갖 종류의 경제지표를 들이대고 있다.둘 다 틀렸다. 지난 10년은 양극화 성장체제가 안착되고 구조화되어 버린 ‘한국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체제의 불안정성과 국민 불안 심화’의 10년이었다. 지금 국민 대다수는 불안하다. 그것도 만성화된 불안이고 때로는 절망이고 분노다. 그래서 자살률이 세계 1위다. 우리는 그런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위 5대 불안이 그것이다.첫째, 일자리 불안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 얻기가 어렵다. 그러니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시열풍에 휩싸여 있거나 의학전문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아마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은 죄다 이리로 가는 모양이다.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용불안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잘리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장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직업교육과 평생교육체계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잘릴 염려가 없는 직업을 구하거나 해고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고용은 경직되고 도전정신과 창의성은 줄어들고 일자리 불안은 심화된다. 일자리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다.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의 고용 비중은 2004년 현재 약 87%로 1999년의 약 82%에 비해 그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성과 임금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대기업 대비 중소제조업의 생산성은 1994년 43.2%였으나 2004년에는 31.3%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고스란히 임금격차로 이어져 1995년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월평균 임금수준이 76.3%였던 것이 2005년에는 64.3%로 떨어졌다.경제구조의 이러한 양극화와 양극화 성장체제가 일자리 불안의 근원이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새롭게 필요한 부분에서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하겠으나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 논리에 사로 잡혀 이 부분의 일자리 창출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게 된 것도 일자리 불안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2003년 현재 OECD 국가들의 사회서비스 고용 비중을 보면 노르웨이 34.2% 덴마크 31.3% 핀란드 27.3%였고 OECD 평균이 21.7%이었으나 우리나라는 12.6%에 그쳤다.둘째, 보육 및 교육 불안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다. 개천에서 용 나게 하겠다는 우리네 부모의 오래된 욕망 탓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제 개천에서 용 나기는 어렵고 보육과 교육에 대한 불안만 가중되고 이것이 세계 최고의 ‘아이 안 낳는 나라’로 귀착되고 있다.2005년 현재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1.08명으로 스웨덴의 1.9명에 비하면 거의 절반 수준이다. 저출산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부담 또는 소득과 고용의 불안정’이다. 보육의 공공성이 높은 북유럽 나라들 특히 스웨덴의 보육료 정부 부담비율은 80%를 상회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2007년 현재 약 46% 수준이다.우리나라 보육시설의 공공성(국공립보육시설)은 시설 수 기준으로 5.2% 아동 수 기준으로는 11.3%에 불과한 실정이다. 유럽 선진국들은 공교육체계 덕택에 가계의 교육비 부담이 거의 없으나 우리나라는 서민가계를 불안과 고통과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국내 사교육 시장의 총 규모는 명목 GDP의 3.95%에 해당하는 33조 5000억 원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2007년 정부의 교육 예산 총액 31조 원보다도 많은 것이다.교육은 지식경제 사회에서 성장 동력이 되는 인적 자본의 확충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의 기본적 요소인 기회의 평등이란 차원에서도 사회구성원 모두에서 공평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공공재다.그런데 우리나라는 보육과 교육에서 공공성이 극히 취약하고 가계 부담의 크기가 큼과 더불어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어 중산층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셋째, 주거 불안이다. 최근 수년 간의 집값 오름세로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내 집 마련에 걸리는 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 집이 주거공간이라기 보다는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는 독특한 우리나라 주택 문화 하에서 주거불안은 상대적 불안과 절대적 불안으로 중층적인 성격을 띤다.내 집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간 좋은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과 절대적으로 저열한 주거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또는 그럴 가능성에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의 절대적 주거불안이 그것이다.건설교통부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16% 가구 수로는 255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최저주거 기준 미달가구 중에서도 최하층인 주거극빈층이 있는데 이들은 지하방 옥탑방 판잣집 비닐집 움막 등에 살고 있는 계층으로 68만 가구 160만 명이 이에 해당한다.우리나라 국민들의 강력한 내 집 마련 욕구는 차치하고라도 공공임대주택 정책 등의 공공주거정책을 통해 서민과 저소득층의 주거불안을 우선적으로 해소해 주어야 하겠으나 2006년 말 현재 한국의 임대주택의 비율은 전체 주택의 9.8%에 그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장기공공임대주택은 3.0%에 불과한 실정이다. 중산층의 어느 가계라도 처할 수 있는 주거불안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안전망은 우리나라에서 극히 미약한 것이다.넷째, 노후 불안이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07년 현재 약 10%이고 2018년이면 14%로 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이제 노후 문제는 대상인구가 크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전체의 심각한 대응 문제임과 동시에 개별 가계에게는 큰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2004년도 전국 노인생활실태 및 복지욕구조사에 의하면 노인 중 13.9%가 공적연금을 8.6%가 국민기초생활보장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고 노인의 78.6%가 사적 이전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노후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자 서민가계의 큰 불안과 분란의 이유가 되고 있다.빠듯한 서민 가계에서 어른을 봉양하고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안정적으로 가능한 가계가 얼마나 되겠는가? 내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70%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한다고는 하나 최고 금액이 8만 4천 원 정도에 그치므로 노후 불안을 잠재우는 데서 실효성은 거의 없을 전망이다.생색내기용 기초노령연금이 아니라 모든 노인에게 기초생활이 가능한 최저생계비(2007년 현재 약 46만원)에 근접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실질적 기초연금제도가 작동하는 국민연금제도의 개혁이 없는 한 노후불안 문제는 장차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다섯째, 건강 불안이다. 2007년 2/4분기 가구 당 월평균 의료비 지출액은 12만 1600원으로 전년 대비 13%가 증가하였는데 같은 기간에 소득은 약 6%만 증가하였으므로 의료비 지출액 증가율은 소득 증가율의 2배를 초과한 셈이다.현재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전체 의료비 중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부분의 크기)은 64.3% 수준인데 유럽 선진국들의 대부분이 85-90%인 것에 비하면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식구 중에 누가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초죽음이 된다.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간병시스템의 미비도 대한민국 일반적 가계가 겪는 건강불안의 한 원인이다. 설상가상으로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큰 병에 걸릴 경우 서민 가계는 몰락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본인부담 의료비는 물론이고 질병으로 인한 소득상실을 보상할 아무런 제도(상병수당)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나머지 4대 불안은 자동으로 작동된다.이러한 불안이 서민가계로 하여금 무리하게 각종 민간의료보험과 생명보험 등에 가입하도록 몰아가고 하루하루의 힘겨운 민생과 각종 불안이 뒤범벅된 안타까운 우리네 일상을 연출하게 한다.그런데 문제는 더 큰 데 있다. 우리 국민들의 불안에 대한 사회심리가 그것이다. 불안함에도 스스로는 그것을 불안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숨기려 한다는 사실이다.내가 처해 있는 처지 즉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불안정과 불확실성 등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처해있는 환경이므로 이를 하나의 조건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다.보편적 복지체제가 없어도 능동적 복지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도 우리나라 경제체제가 그리 공정하지 않아도 사회정의의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이를 불만거리로 삼기보다는 유능하고 경쟁력 있는 개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불안이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로 파편화되어 개인의 정신과 신체와 개별적 삶에 내재화된 채로 만성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악순환을 하게 된다.불안이 개별적 삶에 내재화된 국민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사고 기껏해야 가족주의에 매몰되는 이기적 삶을 고수하려 한다는 점이다.이타심 공동체적 관심 인간의 존엄 사회적 연대 사회정의 등의 가치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의 가치에 종속되는 사회적 상황이 도래하는 데 이것이 바로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설명해주는 국민 불안의 사회심리다.이런 방식은 문제의 해법이 아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악순환의 고리를 따라 더 큰 불안으로 내몰릴 뿐이다. 이제 우리는 불안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의제로 삼는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이 문제는 애초부터 정치적 문제였다. 불안의 본질적 이유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구조와 잔여적 복지제도 탓이기 때문이다.즉 1997년 이래로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정책 10년을 거치면서 경제구조가 양극화되었음과 동시에 복지체제는 과거의 미흡한 영미식 잔여/선별주의를 고수함으로 인해 보편주의 복지체제가 가져다주는 기회 균등과 사회적 안정성 구조와 이로 인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더 나은 축적 기회를 놓쳐 버렸고 이로 인해 국민 개개인 차원에서는 삶의 전반적인 불안정성이 커지게 되는 바 이것이 종합적으로 작동하여 민생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문제의 해법은 ‘불안의 원인은 우리나라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체제에 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고 국민적 요구를 조직하는 것이다.이를 위해 학계 시민사회단체 개혁적 진보정치세력이 함께 나서야 한다. 통합적 협력적 방식으로 우리사회의 보수화 추세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불안이 국민 개별적 보수화의 사회심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수준에서는 진보와 개혁을 향한 역동적 변화의 에너지임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이다. 먼저 시작하고 함께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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