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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숙 원광대학교 교수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22대 총선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대한민국 공동체가 계속 퇴행할지, 한걸음이라도 전진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역사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미디어에서도 저마다 4.10 총선의 정치적 함의와 시대전환적 의미를 피력한다. 집권 중반의 선거는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일 수 밖에 없다.검찰 수장이 대한민국 최고권력을 잡은 후 우리는 그 권한이 얼마나 사유화될 수 있는지, 권력의 칼날이 어떻게 행사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며, 입법 권력을 통해서라도 현 정권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게 되었다.그간 여러 희생과 고난을 감내하며 켜켜이 쌓아 올린 민주주의의 근력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이제 임계점을 넘어가버리기 전에, 더 많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욕망으로 점철된 정치로 갈 것인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익추구가 아닌 공동체의 공공선을 위해 행사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국민들은 진영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진정코 우리 공동체를 한 걸음 전진하게 해줄 정치인을 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권은 몇 해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 말고는 직접 행사하는 정치적 주권이 사실상 없다.투표권 외에 헌법과 법률을 발의할 권리도, 발의한 법률에 대해서 국민이 투표할 권리도, 공약을 이행하지 않거나 허튼짓을 하는 국회의원을 소환할 권리도 없지 않은가. “국민을 하늘같이 존중하고, 범같이 무서워하는” 정치인을 선출하자. 대한민국의 회복탄력성을 기대한다. 1. 안보와 외교! 대한민국이 불안하다 현 정권이 들어선 후, 하루하루가 우울한 뉴스로 장식되고 있다. 온갖 분야의 퇴행과 그로 인한 아우성이 도를 넘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정치가 해법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정권은 ‘입틀막’으로 대응하는데 급급하다.권력을 가진 소수의 섣부른 결정이나 독단으로 인해 국민 다수가 겪어야 할 고통의 크기는 비교 불가하다. 한반도 전쟁 발발 우려가 대표적이다. 물론 복잡한 국제적인 힘의 역학 구도가 맞물리는 사안이지만, 무엇보다도 연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권력자들의 무모함이 위험천만하다.우발적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합의한 9.19 남북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북한도 사실상 그 합의를 파기하는데 이르렀고, 국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한미일 3국 동맹 강화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필요한 자극은 그야말로 불필요하고 위험하다. 공멸로 가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가자.출구 없는 압박은 파국으로 가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는 엄혹한 현실이 되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보복과 응징이 먼저가 아니다. 협상력이 아쉽다.먼저 평화와 화해를 위한 실력발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만보다 한반도에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니, 참으로 위험천만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그리고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에 외국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린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우리 사회를 가라앉히고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국제관계, 외교가 불안하다. 이제 북한과 일본의 수교는 날을 잡아놓은 모양새다. 한-쿠바 수교로 인해 속도감이 붙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일본이 북한과 손을 잡는다면 북한의 방대한 지하자원 채굴권을 갖게 될 것이다.그간 한일 관계 복원을 핑계로 저자세 외교로 일관해온 우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패싱될 것이 예상된다.또한 미국 차기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트럼프가 돌아온다면, 북미 관계가 호전될 것이고 우리나라가 패싱될 것 역시 확실해지지 않겠는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워 외교부 간에 선을 넘는 발언이 오가고 있다. 우리 국방 수장이 우크라이나 직접 군사 지원 필요성을 언급한 후 한러 외교관계도 충돌하게 되고, 러시아는 윤 대통령의 발언도 편향되었다고 문제삼았다.러시아의 현대차 공장은 러시아 업체에 헐값 매각이 이뤄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가 수반이나 장관의 말 한마디로 국익이 막대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대통령이 반중외교를 공개 선언하면서 대중 수출은 급격히 줄고, 우리의 주 수출품목이던 반도체의 중국내 자급률은 무섭게 성장해서 연평균 30%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고, 2년 내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한다.중국과의 무역은 31년 만에 적자를 기록했다. 한미일 일변도 외교로 인해 우리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 국익이 훼손될 일만 남은 것이다. 우리가 위임한 최고권력이 외교 마당에서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2. 언론, 민생, 역사 왜곡! 대한민국이 아프다 언론은 또 어떤가? MB 정권 때부터 언론장악, 언론탄압 장본인으로 비판받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물러나더니, 언론 분야 전문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검찰 출신 대통령 선배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은 가족과 친지를 동원해서 현 정권을 비판했던 뉴스타파를 제거하기 위해 민원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사과 한마디 없다.그는 방심위를 사회적 해악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제 상식도, 염치도 무너진 세상이 되었다. 작년 세계 언론자유의 날에 발표된 ‘국경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는 윤석열 정부 1년 동안 후퇴했다.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불허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과학 연구 분야에서 33년 만에 국가 R&D, 연구개발비를 삭감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래지향적 기초연구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고, 미래 성장 동력을 꺾어버렸다는 평가로 우려가 깊다.태양광 대체 에너지 등 재생 에너지 분야도 아우성이다. 부자 감세로 인해, 유리 지갑인 근로소득세는 늘었지만 세수는 바닥 나고, OECD 전망 경제성장률은 최하위권이다.게다가 물가는 천정부지다. 사과 한 개가 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사과 가격 하나도 잡지 못하는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와중에 역사 왜곡까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이어 ‘건국전쟁’ 영화를 띄었다. 3.17의거와 4.19의거, 그리고 제주 4.3항쟁 피해자들의 응어리와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인가.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법살인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재평가되고 있지만, 국가보훈부에서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극명하게 대비되지 않은가? 3. 최후의 보루는 국민, 선거 혁명 ! 검찰(정권)은 온갖 권력과 요직을 독점하고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이제 선거를 통해 바꾸고 혁명을 이뤄내야 한다. 4.10 총선은 대한민국의 미래 운명이 좌우되는 절대절명의 선택이 될 것이다.윤석열 정권을 심판할 것인가. 아니면 야당에 채찍과 경고를 주어야 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불안과 무서운 권력의 사유화를 걷어내기 위해서 투표장에 가야 한다.무너진 공정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날로 양산되는 갈등과 불신과 증오를 걷어내기 위해서 지혜롭고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 각 분야, 정치에서 지성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것인가. 국제정세는 급변하는데 숙의하고 공론해야 할 많은 국가적 의제들은 어디로 갔는가.권력의 사유화로 인해 절박한 국민들이 촛불을 들어야 하고, 에너지와 시간을 과도하게 소모적인 데 보내야 하는 현실에 조바심마저 든다. 대중적 소구력 있는 사안 만을 염두에 둔 채 정치공학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이제 우리 공동체 요소요소에서 필수적인 분야와 의제를 다루는 정책 대결을 보고 싶다. 다양하게 열린 선거 지형에서 연대하고 힘을 모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이제 헬조선을 깨고 나가도록 선거혁명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리셋해야 한다.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 했다. 영화 『길 위의 김대중』에서 그는 눈물로 국민을 위로한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을 슬로건으로 ‘국민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했다. 선거로 혁명을 일으키자.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장고 끝에 결정한 통합형 비례정당을 통한 준연동형으로 비례성에 따라 각 소수정당에도 원내로 진입할 기회를 줄 수 있어 반갑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타협과 양보의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거대 양당의 독과점을 타파하겠다고 제 3지대를 표방하며 발족한 ‘개혁신당’은 무엇이 개혁인지 그 철학과 방향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조국신당도 소수의 정치 검찰로부터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각오로 출범하였고, 민주화와 공동체 미래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기대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이중에서 ‘리셋코리아행동’의 출범은 주목할 만하다. 각 분야 정책을 점검하고 향후 방향을 제시하는 조직이다. 현 정부를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황을 꼼꼼히 진단하고 향후 방향을 재정립하는 정책 컨텐츠, 선명한 아젠다가 있어 반갑다. 4. 부디 정치에 철학과 윤리를 기대한다. 소위 보수냐, 진보냐 하는 진영의 문제는 사실상 본질이 아니다. 자칫 이편도 저편도 잘 한 것이 없다는 양비론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화 『한산』에서 일본군 포로가 고문을 당하다가 이 싸움의 의미는 뭐냐고 이순신에게 절규하듯 묻는다.이순신은 왜적이 침범해오니 싸운다고 하지 않았다. “이건 불의와 의의 싸움이다”라고 말한다. 선명하지 않은가. 양측의 싸움이 아닌 불의와 의의 싸움이라고 임진왜란을 규정한다. 불의에 저항하자. 독일의 사상가 막스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이라는 널빤지 둘을 겹쳐서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이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최소한 기본 규범이 무너지는 나라는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균형잡힌 사고와 절제된 주장은 정치의 영역에서 핵심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빠른 속도로 퇴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여러 분야를 재건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인기영합 정치보다 제발 컨텐츠가 있는 정책으로 회귀하게 해달라. 정치인들은 공부를 하기 바란다.역사를 그리고 공동체의 윤리와 공공선을……. 『펠로폰네서스 전쟁사』를 곁에 끼고 쇼를 하기보다 그 책의 내용에 집중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이제 더 이상 막말로 상대방을 비난하여 얻는 반사이익으로 표를 얻으려 하는 ‘아무말 대잔치’를 멈춰 달라. 정치인은 연예인이 아니다. 허영심으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욕구를 만족하는 정치를 할 것인가. ‘대의’라고 하는 에토스(ethos, 정신)를 살려 공동체에 헌신을 목표로 할 것인가.대중 영합 정치를 지적하는 말이다. 선거를 통해 세우려는 정치의 본령은 국민을 어루만지고, 억울함을 해소해서 정의를 세우고 민생을 일으키는 일이다. 하루가 급하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4월 10일,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 강경숙은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 본회의 위원, 국가균형발전위윈회 위원을 지냈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집행위원, 국무총리실 장애인정책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겸 교육복지위원장, 위기청소년을 위한 ‘한국청소년포럼 나다’ 대표,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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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체감온도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뒤질세라 대선후보들이 내걸고 있는 공정 이슈가 뜨겁다. 여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지사는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공정이라며 ‘성장과 공정’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1호 공약으로 “전환적 공정성장”을 내세웠다. 이낙연 후보도 출마선언에서 상처받은 공정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며,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공정의 가치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정의와 공정의 기치를 내세우며 출사표를 던졌다. 가족에 대한 검증이 구체화될수록 검찰과 재계 유착을 의심케 하는 대목에서, 이재명 후보는 “선택적 정의는 방치된 부정의보다 나쁘다”라고 말했다. 여하간 국민의 마음을 사는 데 있어 공정의 가치야말로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치인들이 공정의 깃발을 치켜들기 이전에도 우리 사회는 공정의 이슈가 주된 담론이었다.작년 말 서울대 도서관의 대출 순위 1위는 <정의란 무엇인가>이었다. 2위도 차별과 공정 문제를 다룬 <선량한 차별주의자>이었다고 한다. 공정과 능력주의에 대한 논의를 다룬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당시 예약순위 1위였다.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에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들이 절망 속에서 희망의 근거 찾기를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4년 전의 대선에서도 공정은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촛불과 코로나 사이에서 ‘과정의 공정’을 약속한 문재인 정권은 여러 면에서 개혁을 시도했고, 공정한 사회를 지향했지만 ‘공정 지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블라인드 면접과 같이 편견을 줄이고 공정하게 선발하고자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지만, 젊은 세대는 불공정이 우리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라고 느낀다. 코로나19 이후 뉴노멀(새로운 표준)을 만들어야 할 시기에 정치인들의 빅 마우스(big mouth)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공동선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능력주의’로 경쟁하면 된다고? 우리나라의 능력주의자들이 본래 의미의 능력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근대적인 암기 위주의 입시와 시험을 공정의 잣대로 치환하는 ‘닥치고 시험’ 주의이다. 조국 가족의 입시 문제에 대해 갖은 이유를 붙여 멸문지화를 당할 만큼 조롱하더니, 결론은 오지선다형의 수능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홍준표 대표는 사시 부활론자이고, 본고사 부활을 외치는 야당 정치인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보수 진영에서 혁명이나 일어난 것처럼 떠들썩하게 등장한 이준석 대표도 ‘닥치고 시험’ 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생뚱맞게도 공직후보 자격시험을 공약하더니 대변인을 경쟁 방식으로 뽑았다. 공정의 기치 아래 토론 배틀과 압박 면접을 거치고 국민문자 투표까지 실시하면서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으니 가히 흥행에는 성공했다고 해야겠다. 그의 ‘공정한 경쟁’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기회의 평등이란 명목 하에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것만이 불공정에 대한 해답인가?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능력주의를 내세우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겨냥하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시대의 정의를 고민하는 학자답게 서구 능력주의의 위선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귀납적으로 입증하였고, 전제와 논거가 결과와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분석하였다. 서구의 능력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판국에 우리 사회 일각의 왜곡된 능력주의가 앞뒤가 맞지 않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넘어 불공정을 정당화하고 심화시키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의 정당화를 지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엘리트 사회 중심으로 짜인 사회구조와 분위기는 공정과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패자가 단순히 경기에서 패했기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로 인해 겪는 삶의 부조리 또한 당연하다면 그러한 공정이 과연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인가? 그는 또한 사회의 불공정이 증가할수록 사회는 불평등해진다는 점을 역설한다. 능력주의는 성공한 자들을 성공에 취하게 하고, 그들이 성공하는 데 따라주었던 우월적 환경과 행운을 잊어버리게 한다. 봉건시대의 귀족사회에 못지않은 불평등이 능력주의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노력과 땀은 고귀하지만 재능 없이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각 집단에서 재능, 노력, 환경, 운에 따라 성공하는 사람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처럼 늘 일부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공정한 시대, 더욱 벌어지는 격차 코로나19 사태 초기, 경제가 마비되고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 가량이 추가로 빈곤 계층으로 내몰릴 수 있다며, 포괄적인 구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연합뉴스, 2020.4). 바이든은 불공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자증세를 제안하고, 유럽연합도 미국과 함께 공평과세로 세제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이후의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소장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소득불평등이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자본소득, 즉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른 현상을 우려하였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피케티지수’가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독일의 두 배를 넘는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절반에 육박했는데, 문제는 이 소득 격차가 자본 집적이 고도화된 선진국보다도 더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가 지배적인 신세습사회가 되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두터운 격차의 장벽을 한 뼘이라도 낮추어가며 공존하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인가?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지만, 지난 세기 말에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준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1990년대의 지존파 사건! 엽기적인 연쇄 살인 행각을 벌였던 10대,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들, 그들의 범행 동기는 빈부격차와 부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두목 김기환은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도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진로가 좌절되면서 범죄로 빠져 들었다. 야타족과 오렌지족, 부유층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찰 포토라인에 선 이들의 분노에 찬 눈빛에서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불안과 분노, 평생을 패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열패감과 두려움이 읽혀졌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때보다 더 공정한가? 함께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구체적인 보상 체계가 마련되어 있는가? 흙수저라는 자조적 자의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는 수많은 성장 세대들이 사회 초년생으로 진입하자마자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로, 등 떠밀려 시작한 자영업자로 가혹한 삶을 마주하고 있다. 게다가 60대 청소 노동자의 죽음, 40대 택배 노동자의 죽음, 비정규 청년 노동자의 죽음, 어느 이름 모를 이주 노동자의 죽음까지. 이뿐이랴, 가난과 질병 속에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들, 빈곤의 종착지 무연고 죽음, 채무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선택한 일가족의 극단적 죽음도 있다. 불공정을 이겨낼 힘, 제도적 공동선 추구해야! 다시 마이클 샌델 교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코로나19 때 자발적으로 월세를 내려서 어려운 세입자의 짐을 덜어준 건물주 사례를 들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 얘기란다. ‘피케티지수’가 악화되어도 공동체를 살리는 힘,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건물주가 나타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피케티의 덕담(?)은 사회의 공정 이슈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K-방역의 성공도 알고 보면 국가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의식이 집단적으로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나 혼자만 안전하다고 해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수천 년 간 시련과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집단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대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는 집단 공속성과 감수성이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에는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위기 징후가 나타나면 이를 감지하고 사회적 유대를 통해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모드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익숙한 문화이기에 몰랐지만 샌델 교수는 미국 사회에는 없는 특징이므로 새로운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K-방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장기적으로 불공정 이슈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잘 해결되리라고 낙관하는 근거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각자 개인이 이룩한 성과, 결실, 성공은 능력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각자의 실력과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자연의 바람이 나를 키웠다는 표현은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바람으로 상징되는 모든 총체적 요인, 어쩌면 젊음의 방황과 시련, 우연과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상호관계를 통해 성장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일 게다. 서구의 능력주의자들이 개인의 성공을 자신의 실력과 노력의 결과임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반면, 우리 선조들은 “운칠기삼”의 결과라며 겸손하게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였다. 자신보다는 공동체의 다양한 요소가 긍정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자신의 능력 이상의 성취가 가능하였다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실력보다 운에 기대야 하니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운명론적 발상이 아니고, 그만큼 주변에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적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요즘처럼 복잡계로 얽힌 사회에서 개인에게는 행운처럼 다가오는 사회의 ‘공동선’이 절대 다수를 패배의 낙인에서 구제하는 안전망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나의 실력과 노력에 비해 큰 성취와 성공의 기회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젊은 세대들이 느낄 정도로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공동선이 강조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공정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강경숙은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7~2018년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 본회의 위원을 지냈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육 분과 위원, 전라북도교육청 인사위원, 국립정신건강센터 미래비전자문위원, 국무총리실 장애인정책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겸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경숙 (원광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 webmaster@parang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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